I 미국 개요 1. 지리적 특성 2. 역사와 사회 3. 한국과의 관계
II 미국 이민의 역사 1. 초기의 한 미 관계 2. 하와이로의 첫 노동이민 3. 이민 초기의 한인 생활 4. 이민 초기의 지도자 5. 초창기 단체 및 교회 활동 6. 미주에서의 독립운동 40년
III 미국 한인사회의 현황 1. 인구학적 특성 2. 지역적 분포 3. 사회 경제적 특성
IV 미국 한인사회의 생활 1. 경제와 정치 2. 가족과 종교 3. 문화와 교육 4. 1.5세 및 2세 5. 한국과의 관계 6. 자랑스런 한인 후예들
V 미국 민족 문제와 한인의 정체성 1. 미국의 민족 문제 2. 재미 한인의 정체성
VI 전망과 과제 1. 전 망 2. 과 제
머리말
한반도의 42배나 되는 광활한 영토에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어우러져 삶을 꾸려가는 미국, 그 곳에는 중국지역 다음으로 많은 1백 80여만 명의 한인 동포들이 살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100여 년 전 이미 국교를 맺고 그동안 우호적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으며, 인정·물적 교류의 폭이 그 어느 나라 보다도 넓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으로서의 한인 이민역사는 광복 전의 역사와 광복 후의 역사로 대별할 수 있다. 이렇게 크게 양분하는 것은 이 두 시기가 시간적 연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민의 목적과 조건 그리고 이민자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광복 전의 이민은 구한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노동이민과 일제치하의 정치적 망명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조국이 국권을 상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과 여러 방면에서 단절되었고 그 숫자도 미미했던 반면, 광복 후의 이민은 한국이 독립국이 된 후 이루어져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고, 이민의 목적·조건·성격·과정 등이 전자와 크게 다르다.
이 광복 후의 이민은 시기와 이민 형태의 특성에 따라 다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1945년부터 1965년까지로 유학·국제결혼·입양 등의 사유로 이민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제2기는 1965년부터 1976년까지로 이른바 하트-셀러법(Hart-Celler Act)이라고 불리는 개정된 이민법에 의해 연고자에 의한 초청이민과 전문직 기술이민이 주류를 이룬 시기이며 이 때부터 본격적인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제3기는 1976년 다시 개정된 이민법에 따라 전문직 기술이민이 줄어들고 초청이민이 증가한 시기이다.
1965년 이후 미국 이민자의 특색은 19세기 중엽부터 대규모로 이루어진 중국이나 구소련으로의 이주가 생존을 위한 이주의 성격이 강했던 것과는 달리, 기회의 나라에서 보다 나은 삶의 질과 양을 향유하기 위한 자발적이고 선택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이주의 역사가 짧아 대다수가 이민 1세대인 미국의 한인들은 아직까지 한국 문화와 정체성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1.5세대나 2세대는 상당히 미국화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도 어느 순간 한구계 미국인일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민족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와이의 초기 이민자들은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씩 고된 농장일을 하며 받은 몇 푼 안되는 임금중 일부를 쪼개어 조국의 독립 운동에 보탰다. 40년의 긴 세월 동안 초기 이민자들이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쏟았떤 열정과 노력이 우리 민족의 광복과 오늘의 미주 한인사회 건설에 주춧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등장한 사진결혼, 신도(新渡)학생, 정치 망명 등은 지난 1세기 동안 한국과 미국의 이해증대는 물론, 두 나라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의 이민자들 중 자영업자들은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미국인들의 주당 평균 40시간의 노동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 한인들의 경제적 성공은 이러한 근면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의 교육열은 한국에서와 같이 자녀 교육에 절대적 가치를 두며, 교육자체가 이민의 목적이 된 경우도 상당하다. 대학진학률만 보더라도 백인 평균보다 훨씬 앞선다. 그러나 이들은 영어의 미숙, 전문 기술의 부족, 인종차별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회적 지위의 불일치를 당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미 한인의 절반 이상이 상업과 서비스업에 편중,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1.5세와 2세들은 이같은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미국 주류 사회에 보다 광범위하게 진출하고 있다.
한민족의 미국 이민의 역사가 짧은만큼 재미 한인들이 풀어나가야 할 문제도 산적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LA폭동 때와 같이 흑·백 갈등이 한·흑 갈등의 형태로 표출되어 한인사회가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서부터, 주류사회로의 진출확대, 동포 경제권의 확충, 2세의 정체성 유지, 여성의 지위 향상 등 현안과제가 많다.
이 책의 서술 중점은 미국으로의 이주 역사와 한인사회의 현황, 그들의 가치지향과 정체성 문제, 그리고 해결해야 할 과제에 두고 있다. 그러나 구성집단이 다양하고, 분포지역이 고아대하며, 1백년 가까운 긴 역사를 지닌 미국 한인사회를 한정된 지면에 담으려다 보니 무리가 따랐음을 밝혀두며, 현지 조사 연구가 뒷받침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발표된 연구서에 의한 일반적 논의에 근거한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떤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광복 5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세계 속의 한민족의 삶을 되돌아 정리해 보고, 나아갈 길을 모색해 보는 {세계한민족총서}의 미국편 집필 요청을 받았을 때, 앞서 밝힌 연구의 제한점과 짧은 연구 기한, 혹시 필자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이민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미국 한인사회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등의 이유로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지구촌 한민족의 상호 이해와 민족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공감하였고, 평소 본인이 재미 한인사회에 대한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기에 편찬사업에 기꺼이 동참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부족한 점은 앞으로 보완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이 지면을 빌어 지난 여름 바쁜 시간을 쪼개어 공동연구자로 참여해주신 전북대학 이정덕 교수와 제II장 [미국 이민의 역사]를 집필하여 주신 한국일보 통일문제연구소 민병용 연구위원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995년 12월
최 협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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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개요
1. 지리적 특성
2. 역사와 사회
3. 한국과의 관계
1. 지리적 특성
미국은 북미대륙에 위치한 국가로서 그 정식 명칭은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미국은 면적이 963만 3,350km2로서 한반도의 42배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를 갖고 있으며 인구는 1994년 현재 2억 5,80만 명으로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섞여 있는 다민족, 다인종 사회이다.
지리적으로 보아 미국의 북쪽은 세인트 로렌스 강(St. Lawrence), 오대호 및 북위 49°의 선에서 캐나다와 접하고, 동쪽은 대서양, 서쪽은 태평양, 남쪽은 멕시코만 및 리오 그란데(Rio Grande)와 북위 28°의 선에서 멕시코와 접하고 있다. 플로리다의 남단 및 리오그란데의 하구는 북위 25°에 위치하므로 미국은 25 ~ 49°사이, 즉 거의 온대 지역에 걸쳐있으며, 북미대륙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 본토에는 48개 주가 있으며 1958년과 1959년에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각각 주로 승격시켜 현재는 50개 주와 수도 워싱턴의 콜롬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로 이루어져 있다.
미국 본토는 지형상 동부산지, 중앙대평원 및 서부고지의 세 지형구로 나뉘어진다. 다시 동부산지는 북동쪽으로부터 남서 방향으로 몇 줄기의 병행 산맥으로 이루어진 애팔래치아 산지(Appalachian 山地)와 대서양안 및 멕시코만안에 걸쳐 한 줄기의 평야를 이룬 대서양 해안평야(Atlantic Coastal Plains)로 나뉘어진다. 중앙대평원은 애팔래치아 산지로부터 서쪽 록키산맥(Rocky mountains)에 이르는 동서 2,000km, 남북 2,200km에 걸친 넓은 지역을 차지한다. 대부분은 미시시피강(mississippi) 유역에 속하나 그 상류의 중앙대평원과 남쪽의 멕시코만에 면한 멕시코만안 평야로 나뉘어지며, 그 사이의 서부 일대는 프레리(Prairie)라고 불리는 대초원을 이루고 있다. 특히 동북부에 위치하는 오대호는 미국의 지중해라고 불릴만큼 편리한 수운(水運)을 이루고 있어서 호안 일대는 일찍부터 미국공업의 중심을 이루었다. 서부산지는 주로 코르디예라 산계(Cordillera 山系)에 속하는 지역이며, 그 대부분은 태평양 사면의 유역으로 해안에 나란히 겹쳐진 융기대와 그 사이에 낀 중간대로 이루어졌고, 록키산맥을 비롯하여 콜롬비아 고원·대분지, 콜로라도 고원, 캐스케이드(Cascade)사막,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맥, 캘리포니아 평원, 해안산맥 등이 남북방향으로 뻗쳐 있다. 바로 이 지역에는 자연경관이 장관을 이루어 미국 유수의 국립공원이 많다. 해안선의 연장은 태평양안 및 대서양안이 25,100km, 멕시코만안이 9,200km이며, 호안선은 연장 5,800km에 달한다. 대서양안의 중부이북은 침강해안으로 항구가 발달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어 좋은 항구들이 많이 있는데 반하여 중부 이남 멕시코만안에 이르는 해안은 소택성의 사주가 많고 석호가 많아서 항구가 적다. 태평양안은 해안산맥이 급격하게 발달되어 있어 해안선의 굴곡이 적으나 퓨젓(Puget)만과 샌프란시스코만 등 양만이 생성되어 있다.
미국본토는 위도상 온대에 속하나 국토가 넓고 지형이 복잡하여 지역에 따라 기온의 차이가 크다. 강우량도 풍향과 지형에 따라 태평양안에서는 북부에 많고, 대서양안에서는 남부에 많으며, 대륙내부에서는 비가 적어 초원 또는 사막을 이룬다. 미국을 기후상으로 구분하면 다음의 여섯구로 나뉘어진다. 즉 북위 35°이북, 동경 100°이상의 북동지방은 냉온대 기후지역으로 연해에는 래브라도(Labrador)한류가 흐르고 또한 한랭한 북동풍이 불어서 눈이 많이 내린다. 그러나 여름에는 반대로 남서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서 고온을 이루어 겨울과 여름의 기온 차이가 심하다. 강우량은 1,000 ~ 1,200mm이며,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의 작용은 주민 활동에도 유리해서 미국의 문화적 활동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멕시코만안과 대서양 남해안을 차지하는 남동부지방은 멕시코만류의 영향을 받아 고온다습한 아열대성 기후를 이룬다. 동경 100°부근에서부터 록키산 기슭에 이르는 초원지방은 연간 강우량 500mm 이하의 지역으로 목축에 적합하며, 일부는 인공관개와 건조농법에 의해서 농경지화되고 있다. 서부의 코르디예라 산계 내부의 고원지방은 지형의 제약을 받아서葡 대륙성기후를 이루며 또한 강우량이 적어서 초원, 반사막, 사막 등의 건조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태평양 북안지방은 편서풍이 강하여 1년 내내 비가 많고 난류가 흘러서 온난하므로 수목이 잘 자란다. 태평양 남안 지방은 겨울에 비가 많고 여름에 비가 적은 지중해성 기후를 이루며, 수목이 무성하고 특히 지중해성 과실이 풍부하다.
2. 역사와 사회
북미 대륙은 원래 토착 인디언들이 거주하던 땅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Columbus)가 유럽인으로는 처음 신대륙에 도착하였고 그후 1세기가 지난 1584년부터 영국이 조직적인 이민을 보냄으로써 본격적인 식민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유럽 각국 정부는 신대륙을 식민 기업가의 손에 맡겨 개발해 나갔기 때문에 유럽 이민은 대체로 농업노동자나 소작인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흑인노예는 1619년에 비롯되었는데 1690년 이후 그 수가 급증하였으며 그 노동력은 식민기(植民期) 아메리카 농업의 근원이 되었다.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이 증가하고 북미 대륙에서의 경제적 기반이 다져짐에 따라 주민자치 운동이 활발해졌고 결국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을 일으켜 1776년 7월 4일 마침내 필라델피아에서 아메리카합중국의 독립이 대내외적으로 선포되었다. 1787년 9월 17일에는 합중국 헌법을 제정하였고 1788년 7월에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 헌법은 1789년 9월의 인권선언을 첨가하여 기본적 인권을 확립하였고, 이후 미국 민주주의의 근원으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독립전쟁 후의 약 80년간은 산업발전의 시기로서 농업국으로부터 공업국으로 변모하는 기초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농업이 발달하여 대농업경영 등 대토지 소유제가 일찌기 발달하였고 1793년 조면기의 발명 이후, 면화 재배가 성황을 이루게 됨에 따라 남부의 대농원 소유자는 노예제도를 한층 강화시켜 나갔다. 이에 반하여 북부에서는 1850년대에 이미 근대적인 임금노동을 기초로 하는 공업 생산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차이를 배경으로 무역정책과 연방가입문제 등을 둘러싼 남북 대결이 심화되었고 1861년 2월 남부는 드디어 연방 탈퇴를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동년 4월 남북전쟁이 시작되었고 1865년 4월 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남북전쟁 이후 연방 정부의 지원 하에 미국의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의 미국 사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립 세력들 사이의 마찰로 특징지워진다. 그것은 소위 미국의 원주민과 새 이민자들간의 마찰이었으며 도시 상공인과 농민의 마찰이었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마찰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미국의 자본주의는 급속도로 발전되어 갔으며 점차로 세계 대국으로의 성장을 계속하였다. 1867년 소련으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이고, 1898년에는 하와이를 병합하였으며 1899년에는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필리핀과 괌 섬을 또한 병합하였다. 20세기 초엽에는 때때로 경제적 불황에 시달리기도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럽에의 물자 공급을 통하여 미국의 자본주의는 고도의 근대적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30년대의 경제 공황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내세워 산업부흥법(NIRA)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새로운 사회경제 정책을 시도하였다. 1940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국의 생산력은 급격히 증가하였고 1945년 연합군의 승리와 더불어 미국은 소련을 정점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서방 진영의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즉 1947년에는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자유를 수호, 자유제국에 원조를 제공한다'는 트루먼주의가 선포되고 마샬계획 등을 통한 대외 원조와 군사 동맹의 확대 등으로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이 추진되어, 동서 냉전의 서막이 열렸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계속 강화된 냉전 체제는 미국을 한국전과 월남전에 참전토록 만들었으며 1970년대 월남에서의 쓰라린 패배를 경험케 하였다. 그 후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동서 냉전 체제는 무너졌으며, 그러한 점에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은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라크와의 전쟁 등에 반영되고 있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으로서 1994년 현재 육군 559,900명, 해군 482,800명, 해병대 174,000명, 공군 433,80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94년도의 군사비는 2,800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은 한국, 일본, 필리핀 등과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호주·뉴질랜드 및 미국의 태평양 공동 방위체 (ANZUS), 리오조약 등에 가입하고 있다.
미국은 이민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다인종 국가로서 그 인종구성을 보면 1994년 현재 백인 83.4%, 흑인 12.4%, 아시아·태평양 지역계 주민이 3.3%, 아메리카 인디언 등 기타가 0.8%이다. 종교 역시 다종교 국가이나 청교도가 이주하여 시작된 나라답게 기독교가 압도적이다. 즉 종교 인구는 기독교가 56%, 천주교 28%, 그리고 유대교가 2%로 합하면 86%에 달한다.
정치체제는 연방 공화제로 50개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부 형태는 대통령 중심제로 매 4년마다 선거가 실시된다. 의회 형태로는 상·하 양원이 있는 바, 임기 6년의 상원은 각 주에서 2명씩 합계 100명이고 하원은 임기가 2년으로서 그 숫자는 435명이다.
자유무역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은 이를 위한 세계 무역 기구(WTO)를 출범시키는데 주역을 담당하였고 세계 각국을 겨냥한 무역 외교를 활발히 벌이고 있는 나라이다. 1993년의 무역 실적을 보면 수출은 4,647억 7,300만 달러였고 수입은 6,034억 3,800만 달러로 상당한 무역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3. 한국과의 관계
조선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것은 1882년으로 이는 정부가 스스로 원해서이기 보다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복잡한 국제 관계하에서, 청(淸)이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서양의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도록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그후, 1883년 조선의 특별 사절단이 미국에 파견되었고, 조선에서는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910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국가간의 관계는 중지되었고 다만 선교사와 같은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만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해 9월 9일 하지 중장 지휘 아래 미군 부대가 인천으로 상륙하여 실질적인 남북 분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해 9월부터 시작된 미군정은 그후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미군정 하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1948년 5월 대한민국 정부가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출범하였고 미국은 한국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로 자리를 굳혔다. 이는 1945년 이후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시작하여 건국을 지원하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곧 참전을 결정함으로써 북의 남침을 저지하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해방 후 미국은 대한민국의 가장 충실한 후원국이자 한국전에서 많은 미국인들이 피를 흘린 혈맹으로서의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미국은 1945년 이래 한국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쳐 온 나라이다. 교육제도를 비롯한 많은 제도가 미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 등 모든 부문에서 미국의 영향이 컸다. 교육 부문의 경우를 보더라도 미국은 한국의 유학생이 그 동안 가장 많이 수학한 국가이며, 교육의 개방화 물결을 타고 그 경향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미국 내의 대학에서도 한국에 관한 강좌가 다른 나라에 비하여 크게 늘어났다. 1952년 하버드 대학에 한국학 연구소가 설치된 이래 1960년대에는 콜럼비아 대학과 워싱턴 대학, 그리고 캘리포니아(버클리)대학에서 한국 관련 과목들이 개설되었다. 1970년대에는 뉴욕주립대(스토니브룩), 캔사스대학, 펜실베이니아대학, 브리검영대학, 남가주대학에서 '한국어', '한국 문학', 한국 역사' 등에 관한 강좌가 시작되었다. 1980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로스앤젤레스), 조지타운대학 등 모두 15개 대학에서 한국 관련 강좌가 개설됨으로써 미국의 주요 명문 대학들에서 한국학 강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 셈이다.
한·미 관계는 한국의 경제력 신장에 따른 국제적 역할이 증대함에 따라 서서히 동반자적인 관계로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적으로 긴밀한 협력이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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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의 역사
1. 초기의 한·미 관계
2. 하와이로의 첫 노동이민
3. 이민 초기의 한인 생활
4. 이민 초기의 지도자
5. 초창기 단체 및 교회 활동
6. 미주에서의 독립운동 40년
1. 초기의 한·미 관계
한민족은 시련과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성장과 번영을 이룩해 온 자랑스런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온 우수한 민족이다. 구한말에는 열강의 침략야욕과 개방압력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기를 맞이했지만 서양제국과의 수교와 통상 등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를 수용함으로써 이에 대처해 나갔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획을 그은 발전적인 계기가 있었다면, 이는 바로 가장 부강한 민주국가인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선진문물을 받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 1백년 동안 이웃처럼 가까이 지내온 나라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비록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양국은 국제사회에서 그 유례가 드물만큼 깊은 이해와 교류, 그리고 협력관계를 증진시켜 왔다.
한·미 교류시대는 1세기(1882 ~ 1982년)를 넘어섰고, 제2세기를 향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이 주역이 될 21세기에 두 나라는 자유와 평화, 복지라는 지구촌의 공동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동반자로서 더욱 성숙된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이 확실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우던 조선이 미국과 '한미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때는 국내적으로 수구·개화세력의 갈등이 고조되고 국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 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던 격변의 시기였다. 1882년 4월, '한미우호통상조약'이 조인되었는데, 이는 당시 조선이 지금으로부터 1세기전 서양의 어느 나라와 맺은 조약보다도 미래 지향적인 뜻이 담겨 있다. 한·미 두 나라의 국교수립은 한국 외교사에 있어서 '세계를 향한 하나의 거보(巨步)'라고 표현할 수가 있다.
조선과 미국의 만남은 그 역사가 깊다. 1882년 공식적인 조약체결을 위한 만남 이전에도 몇 차례의 우연한 조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마다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며 이해를 하게 되었다. 한·미 두 나라는 전쟁이나 유혈 충돌보다는 지극히 평화적이고 인도적인 접촉으로부터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과 미국의 첫 대면은 1853년 1월 28일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하와이에 기지를 둔 미국포경선 '사우스 아메리카'호가 일본인 표류자 두 명을 본국에 인도해주기 위해서 먼저 부산 용당포에 닿았던 것이다. 이 배에는 선장인 워싱턴 워커씨 가족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조선 관헌들이 선상에 올라 미국인들과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10일간 체류하던 이들은 안전하게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1855년 6월 강원도 통천해안에, 1865년에는 경상도 영일 해안에 미국 선원이 표류 끝에 상륙한 사실이 있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른 채 그저 외국인으로만 알고 육로로 청국에 호송을 해 준 바가 있다.
두번째 한·미 접촉은 1866년 1월 11일 미국 범선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철산부 선천포해안에 표류되었을 때였다. 항해도중 난파된 서프라이즈호의 선원들은 관헌들의 호의로 음식, 의류, 담배 등을 제공받은 후 말을 태워서 청국으로 보내졌다. 이때가 조선과 미국이 상대방을 확실히 알고 접촉한 뜻있는 만남이었다.
세번째로는 1866년 7월 11일 미국상선 '제너럴 셔어먼'호가 평양 연안에 상륙을 한 때였다. 천진에 체류중이던 미국인 프레스톤이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한반도로 항해를 해 온 것이다. 이 배는 황해를 거쳐서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 왔고, 평양경내까지 와서 닻을 내렸다. 선장 등은 교역하기를 원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교 탄압의 책임을 묻는 등 위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식량을 내놓으라고 무기를 들이대기도 했으며 민간인들에게 포격을 가해서 여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에 평안도관찰사 박규수(朴珪壽)는 화포공격을 개시했고, 조그마한 배 3 ~ 4척에 화약과 인화물질을 가득 실은 채 불을 붙여 셔어먼 호에 부딪치게 했다. 셔어먼호는 화염에 휩싸였고 선원들은 불에 타 숨졌다. 셔어먼호 사건은 한·미 접촉 가운데 최초의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이 된다.
네번째로는 1871년 5월 19일 미국의 아시아 함대 군함 5척이 존 로저스 제독의 지휘로 강화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셔어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따졌고 보복적인 포격을 감행해서 3백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6월 10일 이 함대는 중국으로 철수 했고,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라 불리우는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조선에 대해서 수교교섭을 여러차례 시도해 왔다. 그후 조선은 일제의 무력에 의해서 1876년 최초로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중국의 이홍장(李鴻章)은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가질 것을 조선 조정에 권고하므로써 미국의 로버트 슈펠트 제독이 천진을 떠나 한·미수교를 맺기 위해서 강화도에 도착했다.
고종은 1882년 3월 24일 신헌(申櫶)을 전권대신으로, 부관으로는 김홍집(金弘集)을 임명했다. 양국대표는 4월 4일 위임장을 교환하고 정식수교를 위한 회담을 열었다. 그리고 제물포에서 '한미우호통상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전문 14조의 이 조약의 첫머리는 '대조선국과 아메리카합중국은 두 나라 인민 사이의 영원한 친선우호관계를 수립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조약체결 후 당시 조선은 서양의 여러 나라와 차례로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한미조약이 발표된 다음해인 1883년 4월 미국 전권공사 푸우트(Foote)가 서울에 부임했고, 5월 20일 고종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조선정부는 그 답례로 1883년 7월 19일 민영익(閔泳翊)을 전권대신에 부관으로는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청년 정치인을 임명해 미국에 파견했다. 민영익 등 사절들은 미국 대통령 이하 국민들로부터 '주의깊은 환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888년 1월 17일 박정양(朴定陽)은 초대 주미공사로 신임장을 받았고, 미국은 다시 호레이스 알렌을 주한공사로 보내면서 본격적인 외교 시대를 열었다. 이즈음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 기독교 전파와 교육사업 등에 나서고 이러한 한·미교류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때까지 그 맥을 이어 나갔다.
2. 하와이로의 첫 노동이민
한미우호통상조약 제6조에는 '양국 상인은 서로 왕래 교류를 하면서 토지와 건물을 매매할 수 있다'며 적법한 상행위를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두 나라 민간인의 상업교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초기 대미관계는 상인끼리의 왕래보다는, 공식적인 한국의 노동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진출한 것이 더욱 의미가 크다. 또한 그 숫자는 적지만 조선의 인삼 장사들이 미국에 첫발을 디딘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1899년 호놀루루에 도착한 인삼 상인들은 신의주 출신의 최동순, 장승봉, 강군철, 이재실, 박성근 등이었는데, 이들은 중국인으로 분류가 되었고 한국 민간인으로 하와이 이민국에 기록된 첫번째 입국자는 1900년 1월 15일 상륙이 허가된 양백인, 김일수 두 사람이었다. 이들은 '차이너'호를 타고 왔는데 물론 인삼을 파는 상인이었다. 같은 해 1월 23일 상륙이 허가된 한국인이 있었는데 이름은 김신유, 김원육, 최신국이었다.
한국인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는 본격적인 노동이민은 '해외 이주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적 전통에서 살아온 이들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과 가족을 뒤로 하고 신천지를 찾아 나선 것은 개화 사상의 실천이자 본격적인 '해외 교류시대'를 열어간 선구적인 의지로 평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7천여 한국인의 하와이행 노동이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가 있다.
첫째는 대외적인 요인으로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와이 농장주인들은 이미 중국으로부터 노동자를 수입했고, 그 다음으로는 일본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한국인 노동자를 입국시키기로 생각을 한 것이다.
둘째, 국내적인 이유로서, 계속된 혹독한 가뭄과 흉년으로 노동자나 농민들이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세리(稅吏)들의 압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녀 교육문제에 대한 고려도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그 당시 조선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던 '개국진취운동'(開國進取運動)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하와이 사탕수수재배협회는 1902년 5월 한국인 노동자를 모집하려고 존 대쉴러를 파견했다. 그를 통해서 주한 미국공사 호레이스 알렌에게 '지금 하와이로 이민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선의 조정을 설득하도록 건의를 했다. 이 뜻을 받아들인 고종은 이민사업과 신문화 교류사업을 장려하기 위해서 1902년 8월 20일 수민원(授民院)을 설립하고 해외정세에 밝은 민영환(閔泳煥)을 수민원 총재에 임명하여 하와이 이민사업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서울, 인천, 부산, 원산 등지에 개발회사가 설립되고 이민자를 모집했는데, 초기에는 너무 허황된 내용같아서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이민자의 참여가 부진하자 동서개발회사는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설득작업을 벌여 나갔다. 이들은 계절의 차이가 분명한 한국에서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일년내내 기후가 온화하고 상쾌한 하와이로의 이주는 부유한 생활을 보장한다고 선전을 했다. 하와이는 지상의 낙원이며 매월 15달러의 수입을 책임진다고 광고를 냈다.
특히 설득작업을 위해서 당시 인천 내리교회(內理敎會)의 조지 하버존스 목사(한국이름 조원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존스목사는 내리교회의 한국인 신도들을 통해서 그들의 친지나 이웃사람에게 하와이 이민을 설명했으며 서울 등지를 직접 다니면서 교인들의 응모를 권유하기도 했다.
하와이 이민은 수민원에서 발행한 여권인 집조(執照)를 가지고 노동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 첫 해외이민이었다.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에서는 수민원 총재 민영환 등의 환송을 받으며 한국 역사상 첫 공식 이민선이 눈물 속에 미지의 땅 하와이를 향해서 떠났다.
이들은 일본 고오베(神戶)에 도착하여 다시 신체검사를 받앗다. 병이 있는 사람 20명은 그곳에 남게 되고 건장한 체력을 가진 청년 등 101명이 통역원과 함께 미국상선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 질러 하와이로 향했다.
20여 일의 항해끝에 이민자들은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역사적인 도착을 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해마다 이날을 조상숭모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민국에서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일행 가운데 4명은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나머지 97명의 선구자들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국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두번째 상선 캡틴호로 63명의 한국인이, 세번째 배 코리아호로 62명이 속속 도착했다. 이와 같이 시작된 노동 이민 대열은 1903년에 모두 10척의 상선에 1,133명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1904년에 33척의 배에 3,434명이 그리고 1905년에 16척으로 2,659명이 출국하여, 3년간 (1903 ~ 1905) 모두 65척의 이민선에 총 7,226명이 하와이로 떠난 셈이다. 그중에는 남자가 6,048명이고, 부녀자가 637명, 아이들이 541명이었다. 후에 이들 중 964명은 다시 귀국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초기 개척자들은 낮이면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고 밤이면 농막에 들어가 밤을 지샜다. 너무 심한 중노동과 정신적 고통 등으로 병이 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매일 10시간씩 농장일을 했고 하루 임금은 69센트를 받았다. 한숨과 눈물에 젖은 노동생활이 계속되었는데 이들 개척자들은 미주 한인 사회건설과 조국 광복운동의 주춧돌이 되었다.
한편 하와이의 노동이민이 중단된 원인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는 새로운 경쟁자가 하와이에 나타나는 것을 먼저 온 일본인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조국을 움직여서 조선으로부터의 이민 금지령을 내리게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부족했던 일본인 노동자를 러일전쟁이 끝나자 다시 일본으로부터 얼마든지 모집해 올 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점차 하와이 노동자 생활에 실망을 하고 본토로 이주하는 한국인들이 늘어났다. 1905년부터 1907년 사이 모두 1,003명이 캘리포니아 등 본토로 이주해감으로써 한인 사회는 호놀루루에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로 점차 발전해 나갔다.
한편 하와이 이민에 이어, 또 다른 1천여명의 한국인들은 멕시코를 향해서 노동 이민을 떠났다. 멕시코 이민은 영국인과 일본인의 술책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노예와 같은 비참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무작정 새 땅을 찾아나선 것이다.
1905년 3월 6일 제물포에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가는 배가 정박해 있었는데 남자 802명, 여자 231명 등 모두 1,033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1개월의 항해 후에 메리다지방 24개의 어저귀(에네켄)농장으로 배치가 되었는데 하와이보다 더욱 어려운 작업조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4년 노동 계약이 끝나서야 첫 농장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가 허락되었는데, 이들 멕시코 이민 중 일부는 다시 더 나은 새땅을 찾아서, 쿠바의 농장으로까지 흘러 들어간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21년 3월 11일 멕시코를 출발한 291명의 한인은 쿠바 맛나치에 도착해서 농장 노동자로 흩어져서 살아갔다. 쿠바와 멕시코까지 흘러 들어간 노동 이민은 한때는 하와이나 미국으로 다시 이주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잊혀진 종족'처럼 중남미의 어느 하늘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3세나 4세까지 뻗어간 초기 이민 후예들은 한국말과 문화를 잊어버린 채 원주민에 동화되어가고 있다.
3. 이민 초기의 한인 생활
사진결혼(寫眞結婚)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삶의 새 터전을 잡은 한인들은 기대와는 달리 중노동에다 언어와 풍습의 차이, 그리고 고국에 대한 향수 속에 이민의 의욕을 점차 상실해 갔다. 특히 나라잃은 설움까지 겹치자 일부 노동자는 술을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에다 도박에까지 손을 대는 이도 있었다.
갈수록 거친 생활로 일할 마음을 잃어가는 노동자들이 늘어났다. 또한 이웃에게 돈까지 빌리고는 밤새 어디론가 사라지는 이민자가 생기기도 했다.
사탕수수 농장측은 대책마련에 부심하던 가운데, 한인 노동자 중에는 노총각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신자들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지못한 채 정신적으로 방황을 하기 ?문이라는 것에 착안하게 된 것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인들은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노총각들에게 결혼과 건전한 가정생활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지만 하와이에는 동양인 여자의 숫자가 아주 적었다. 그래서 동양인과의 결혼 대신 백인과의 국제 결혼도 한때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인여성들은 우월의식에다 인종차별로 동양인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았다. 한국인들도 말이나 생활습관이 다른 백인여성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자기가 떠나온 고향의 처녀와 사진을 교환하여 결혼을 하는 새 풍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진결혼은 하와이나 혹은 본토에 이민간 노총각이 고국의 처녀에게 사진을 보내 선을 보고, 미주로 시집가기를 원하는 사진신부(Picture Bride)를 맞이하는, 한국과 미국간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동족간의 결혼제도이다.
미국정부도 마지못해 사진 결혼으로 미국에 들어오는 동양인 처녀들에게 영주권을 주기로 허락을 했다. 한국에서 미주 이민길이 막힌 후 사진결혼 제도가 없었다면 노동자들의 각종 사회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을 것이다.
사진신부 제1호로 최사라(23세)가 1910년 12월 2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당시 '하와이국민회' 총회장을 보던 노총각 이내수(李來洙 38세)씨는 이민국에서 민찬호(閔燦鎬) 목사의 주례하에 사진결혼으로 첫 가정을 이루었다.
그 당시 미주의 신랑들은 고국의 신부가 마음에 들면 여행 경비로 2백달러를 보내주었다. 사진결혼은 1924년 5월 15일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14년간(1910 ~ 1924년) 계속되었다. 그 사이 영남 출신의 신부 951명이 하와이로 들어왔고, 상해를 거쳐 북한출신 신부 105명이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이들 사진신부들은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았지만, 남편과의 나이 차이 등 현지 생활에 적응을 하는데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신도학생(新渡學生) 및 정치망명의 대열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兪吉濬)이다. 그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1883년 9월 도미사절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보빙정사 민영익 등 일행은 '두 나라 관계가 날로 더 두텁고 가까워지기를 원한다'는 고종의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한 후 워싱턴과 뉴욕, 보스톤 각지를 돌아보며 선진 서양문물을 체험했다.
두달간의 미국일정을 마친 사절단이 유럽으로 떠난 뒤, 유길준만 혼자 남아서 관비 유학생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미국에 도착한지 1년 반이 되던 때에, 더머 아카데미라는 고등학교에 들어간지 4개월만인 188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유길준은 '서유견문(西遊見聞)'이라는 여행기를 써서 서양문물을 처음 소개했다.
갑신정변에 관련됐던 개화당 인사인 서재필(徐載弼)은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피신, 유학길을 떠났는데 이때 박영효, 서광범도 함께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지워싱턴 의과대학에 다닐 때 윤치호는 에모리 대학에서 수학했다. 을사보호조약 이전에도 어수선한 국내정세 때문에 뜻있는 청년들이 속속 미국으로 떠났는데, 도산 안창호는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리고 독립협회에 가입해 옥고를 치렀던 이승만이 1904년에, 역시 보안회 간부로 활약하다 옥고를 치른 박용만이 1904년 네브라스카에 도착을 했다.
초기 미주 유학생들은 도착시기에 따라 3차로 구분을 할 수가 있다.
1차는 1882년 한미조약부터 1902년까지 망명 혹은 유학을 목적으로 온 이들이다. 이때 도착한 학생들로는 박영효, 백상규, 이대위 등이 있고 이민시대(1903 ~ 1905년)에 이강, 신성구, 신흥우, 백일규, 임두화, 이원익, 정한경, 강영승, 강영대, 차의석, 송헌주, 임정구, 양주삼 등 40여명이 있다.
2차 도미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로 1918년까지 8년 동안 망명으로 출국을 했는데 이들은 여행권없이 신도(新渡)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도착했다. 그 숫자는 541명이나 된다.
신도학생들은 대개 일본배척사상이 강했던 청년 혹은 장년들인데 혼란한 정국을 피해서 중국 상해나 유럽을 거쳐서 미국으로 갔는데,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재미 한인사회 건설과 조국 광복운동 후원에 앞장섰다. 그들은 먼저 온 동포들과 사상이 같았고 정치적 운동과 단체 발전에 헌신했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에는 미주 초기이민 사회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3차로는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 총독부 여행권을 가지고 도미한 학생들인데 그 수는 298명이다. 이들은 공부를 하고 귀국한 사람, 제2차 세계대전 때 통역을 한 사람, 그리고 미국에 영주한 사람도 있다.
정치 망명이나 신도 학생들은 '재미유학생회'를 조직했는데 1913년 5월 4일 네브라스카주 헤스팅스에서 박용만이 만든 것이 최초였으며 회장은 박처우였다. 유학생회는 한국 학생들사이의 연락과 친목, 그리고 학문 연구를 목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후 하와이, 북가주, 오하이오 콜럼버스, 중가주 디뉴버, 시카고 등지에서도 유학생회가 만들어졌다. 1921년 4월 30일 '북미한인유학생회' 총회가 뉴욕에서 열렸는데 이 때에 처음으로 학생단체의 통일 이루었다. 1924년 3월 1일에는 국한문으로 유학생회 잡지를 창간했는데 제호를 <우라키(Rocky)>로 하고 3년간 발행했다.
미주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 사진 결혼, 신도 학생, 정치 망명 등은 지난 1세기 동안 한국과 미국의 이해는 물론 두 나라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기여했다. 이들은 또한 조국을 위한 독립 운동의 전개, 건국 후 조국에 돌아와서 각계 분야에서 공헌, 개화 사상의 실천과 신문물의 도입, 한민족의 영토확장 개념 실천, 미국내 주류 사회로 뻗어나가 인정을 받는 등 선구적인 역할을 맡았다.
4. 이민 초기의 지도자
구한말 나라를 걱정하는 개화사상을 가진 젊은이들이 서양문물을 익히기 위해서 미국으로 떠났다. 수많은 선구자들 가운데 이승만, 박용만, 안창호, 서재필 등의 민족 지도자는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등 이민시대의 큰 별이었다. 이들이 걸었떤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이승만, 외교 통한 독립운동 주도
우남 이승만의 한평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기독교 계통의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익힌 그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난 이후 조국의 독립운동을 벌여 나간다. 그는 건국 후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고 6·25전쟁 이후에는 북진 통일 제창하였으며,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에서 삶을 마감했다.
미주에서 40여년 동안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승만은 민주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기도 했지만 독선적 성격을 가진 인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미주에서 독립운동의 노선으로 외교주의를 제창했고, 약소국가인 한국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물론 세계 열강을 움직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외교 활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이승만은 3·1운동 후인 1919년 9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조직했다. 그리고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총회에 참석해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등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반평생을 바쳤다.
1904년 12월 미국에서 유학을 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를, 하버드 대학에서 문학석사를,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는 등 미주의 민족지도자 가운데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재학 중 우드로 윌 슨 총장(후에 대통령이 되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의 영향을 받았고 이때부터 외교제일주의를 내세우게 된다.
한국에서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펴낸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1910년 서울 YMCA총무로 일시 귀국하기도 했는데 나라를 빼앗긴 뒤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1912년 다시 미국 남감리교회 대회 참석차 도미한다. 조국해방이 될 때까지 그는 하와이, 워싱턴 그리고 상해를 오가며 외교를 통해서 독립을 외쳤다.
1913년 하와이에서 <태평양잡지>를 창간하고 1915년 한인여자학원을 설립했으며 하와이 <국민보> 주필을 역임한다. 1918년에는 호놀룰루에서 한인 기독교회를 세우고 1921년 동지회를 설립하는 등 단체조직에 나선다.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가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 그후에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때인 1941년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광복 후에 영주 귀국을 하게 된다.
박용만, 군사지도자의 외길
박용만은 일제에 빼앗긴 나라는 군사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미주에서 20여년 무력군사훈련을 주도한 인물이다. 우성 박용만은 성품이 활달하고 너그러우며 어렸을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지도자이다.
박용만은 1904년 10월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갔고 처음 네브라스카주에 도착, 링컨 중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06년 9월 헤스팅스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과목을 택했고, 1909년 7월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설립하고 주말에는 젊은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는 {군인수지} 등 군사관련 저서를 내기도 했다. 1913년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신한국보> 주필로 임명받고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는 하와이 오아후에서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해서 군인을 양성했는, 이는 이들을 상해로 파견해서 직접 무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이었다. {아메리카 혁명사}를 펴낸 박용만은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의에 참석해서 한국 문제를 설명한다. 그는 <태평양시사>를 창간하는 등 언론 활동도 계속하는 한편, 1919년 호놀룰루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창설, 본격적인 군사훈련에 들어간다.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이 되고 6월에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하는 등 무장독립운동의 무대를 중국으로 옮긴다. 박용만은 1926년 군사운동의 근거지 확충을 목적으로 북경에 대본영공사를 설립하는 등 활동을 펴나가다가 1928년 10월에 피격되어 사망했다.
안창호, 부국강병의 철학 실천
미주에서 13년간 체류한 도산 안창호는 '홍사단'과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여자애국단'을 창단하는 등 단체를 통한 사회활동, 독립운동에 주력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방향으로 실력을 배양하고, 교육을 통해서 자기완성을 이루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중국으로 건너간 뒤에 벌였으며 미주에서는 개인과 단체가 모금을 해서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도록 활동했다.
안창호가 부인과 함께 교육학을 전공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902년 10월이다.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내려온 그는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기 보다, 바람직한 한인사회건설에 주력한다. 리버사이드에서 귤 따는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국권 회복 운동의 꿈을 키워 나간다. 귤 하나를 열심히 따는 것도 애국을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빙그레 웃는 한인 사회'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를 조직했고, 1905년 '한인공립협회'를 만들어 한인 정치운동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다. 1907년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1911년 미국으로 간 그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활약을 하고 1913년 5월에 흥사단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단한다.
3·1운동 후 그는 재미동포를 통해서 외교활동을 펴나갔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노동총판을 역임했다. 1924년 세 번째로 도미한 안창호는 흥사단 사업 등 조용하게 활동을 하다가 1927년 샌페드로 항구를 떠나 다시 상해로 향한다. 그는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38년 3월 10일 서울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 미주에서 그의 뜻을 이은 국민회, 흥사단, 여자애국단은 40여년간 독립운동의 중심단체가 되었다. 부인 이혜련 여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여자애국단 총부단장으로 활약했다.
서재필, 한인자유대회 주도
1884년 12월 미주에 가장 먼저 도착한 송재 서재필은 한국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필라델피아에서 제1회 한인 자유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갑신정변에 참여한 뒤 일본과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하다. 1896년 귀국했다. 사대주의를 배격하기 위하여 같은 해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등 개화사상을 고취해 나갔다. 특히 한국 언론의 효시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는데, 이를 통해서 평등 사상의 고취와 조국 근대화의 기초를 놓는 역할을 담당한다. 189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1919년 <한국평론 (Korea Review)>을 발간하면서 한국 독립을 위한 선전에 묵묵히 전념했다.
또한 서재필이 만든 '한국친우동맹'은 1백여명의 회원으로 한국의 외교선전을 후원했다. 그의 활동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독립운동은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이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통신부의 외교 고문이던 그의 주선으로 소집이 되었는데 독립과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때 미국의 상업, 교육, 언론, 종교계에 종사하는 유력한 미국인 인사들을 초청하여 국내 독립운동의 진상과 일제탄압 등을 알리고 결의안을 채택했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전남 보성에서 출생했고, 1882년 과거에서 문과에 급제한 바 있다. 다음해 일본 동경의 육군유년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다. 미국에서 첫 번째로 시민권을 받은 한국인이자 의사가 된 그는 조용히 독립운동을 벌여 나갔고 이승만의 외교노선을 크게 지원했다. 1947년 귀국, 1년간 한국에 체류하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1951년 필라델피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5. 초창기 단체 및 교회 활동
주류를 이룬 애국·애족 단체
한인들은 미주에 도착한 후 곧바로 사회 단체를 만들면서 활동해 나갔다. 친목을 목적으로, 혹은 상부상조나 교육장려, 그리고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서 정치적인 활동을 펴나갔다. 단체가 지향해 나가는 이념은 민족주의였고, 그 제도는 민주적인 방식이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물론 단체 난립과 분파 활동 등 처음부터 시련에 직면하기도 했다.
초기 이민 사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단체로는 '대한인국민회'를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흥사단, 대한여자애국단, 동지회, 하와이대한부인회가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이 중 국민회, 흥사단, 여자애국단은 도산 안창호를 지도자로, 그리고 동지회는 우남 이승만의 노선을 따랐다.
캘리포니아에서는 1903년 9월 23일 도산 안창호의 지도와 이대위, 박성겸, 김성무, 장경 등의 발기로 '한인친목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첫 미주단체였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1903년 8월 7일 홍승하, 윤명주, 안정수 등의 발기로 신민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최초의 정치적 단체였다. 그 목적은 구국 정신을 고취하여 일본의 침략 행동에 저항하는 동족단결 국정쇄신이며, 회장은 홍승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재미 한인이 굳게 뭉쳐 조국 광복 운동의 목표를 세운 뒤 미주, 하와이, 멕시코, 원동 등에서 지방총회를 결성했다. 국민회의 창립은 재미한인단체의 통일인데, 처음에는 하와이지방총회와 북미지방총회로 존재하다가 1912년 중앙총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총회장은 정재관, 최정익, 황사용, 문양목, 이대위, 임정구, 강영소, 최진하, 강영승, 백일규, 김호, 한시대였다.
'하와이대한인국민회'는 1921년까지 하와이지방총회로, 1922년 3월부터 1932년 2월까지는 하와이대한인국민회라는 명칭으로 활동을 했다.
'동지회'는 이승만 박사가 1921년 7월 21일 하와이에서 창립했는데 상해 임시정부 지원과 미국 내에서의 외교활동 등을 목표로 했다. 동지회 북미총회가 1929년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도 구성되었는데 하와중앙부의 이사원은 김영기, 민찬호, 김노디, 곽대홍, 윤치영, 김선기였고 북미 총회장은 이살음, 송철, 박호근, 안상학 등이었다.
'흥사단'은 재미 한인의 인재양성을 목표로 1913년 5월 13일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했다. 정치적 활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단우들은 대한인 국민회의 의무를 대행하고 국민회 회원 자격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역대 이사장은 안창호, 송종익, 곽림대, 김성권, 이암, 한시대 등이었다. 흥사단은 오늘날 미주에서는 쇠퇴하고 있으나 한국 내에서는 80년의 역사를 가진 단체로 더욱 성장해 나가고 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3·1운동이 일어난 후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1919년 8월 2일 중가주 디뉴버에서 각 지역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되었다. 목적으로는 1) 조국 독립 운동에 관하여서는 대한인국민회와 협력하고 2) 가정의 일용 사물을 절약하여 독립운동 후원금을 내며 국내 동포의 구제사엄에 노력하고 3) 가정에서 일본 물품을 배척하는 것 등이었다. 당시 1시간에 15센트의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에 이들 한인 부녀자들은 가정보다 조국을 위해서 매월 3달러씩의 회비를 냈다. 이 돈으로 상해임시정부, 워싱턴 구미외교부, <신한민보> 등에 후원금을 냈다. 총부단장은 김혜원, 한성선, 강원신, 황보석, 양제현, 임메불, 이혜련, 박경신, 이화목 등이었다.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는 1919년 4월 1일 설립, 조국 광복 운동을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외교 선전 사업에 후원금을 냈고 군사 활동을 위하여 만주에 있던 대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총사령부에도 구호금을 냈다.
교회의 공동체 구심점 역할
미주 한인들의 교회공동체 활동은 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발을 붙이면서 바로 시작되었다. 초기 이민자 가운데 기독교 교인이 약 4백명이었고 본국에서 전도사업에 봉사하던 전도사도 30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자연스럽게 종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초기 한인들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의 목쿨리어 농장에서 전도사 김이제의 주례로 첫 예배를 보았다. 이어 11월 10일 호놀룰루에 사는 동포들이 안정수, 우병길을 대표로 정하고 감리교회 감회사 피어슨을 만나 홍승하 목사의 지도로 '한인전도회'를 발족시켰다. 이것이 한인 감리교회의 출발인 동시에 한인들의 첫 교회사업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다 돌아온 쉬맨 부인의 주선으로 1904년 3월 11일부터 남감리 교회의 선교부의 보조를 얻어 매그놀리아가에 한인전도회를 차린 것이 그 설립의 토대가 되었다. 이곳에는 남가주 대학에서 공부하던 신흥우가 전도사로 봉사하다가 귀국, 1910년부터는 하와이에 있던 민찬호 목사가 와서 인수를 받았으나 감리교회 예배는 중단되었다.
또한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한인들이 장로교노회 선교부와 교섭을 벌인 결과 노회에서 리처드 목사를 보내 한인 장로교 전도회를 세운 것이 장로교회의 시초였다. 벙커힐의 조그마한 집에서 예배를 보았고, 노회에서는 퓨리처 목사를 파견했으며 한인 전도사 조성환, 방화중, 장원근, 임준기 등이 설교를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1905년 10월 8일 한인전도회를 조직, 문경호 전도사의 주례로 예배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의 출발이었다. 1906년부터 방화중 전도사의 주례로 예배를 보다가 양주삼 목사가 부임해 왔다. 교회사업은 시작한지 10년만에 하와이 각 지방의 예배당 수가 39개소, 교인은 2,800명에 달했다. 또 본토에서의 교회사업도 순조로와 한인예배당은 7개소에 교인은 452명이나 되었다.
초기 이민자들은 자녀들을 예배당에 보내어 종교적인 교육을 받게 했는데 이 때가 한인교회의 전성기였다. 예배당마다 국어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 문화교육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6. 미주에서의 독립운동 40년
초기 이민자들의 애국 독립운동은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되었다. 하와이 노동이민자들이 미주 한인사회를 형성한 뒤 본토와 하나가 되어서 민족지도자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서재필의 독립철학에 따라 정성을 쏟고 자금을 지원했다.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횃불은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즈를 저격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후 3·1운동을 전후해서 독립운동의 의지는 더욱 높아졌는데 조국이 광복의 기쁨을 맛볼 때까지 외교활동, 독립자금 지원, 군사활동이 각 지역에서 펼쳐졌다.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의열 투쟁
한국 정부의 외교 고문이던 미국인 더럼 스티븐즈는 친일파로서 일본의 을사보호조약체결 등을 위해서 일해 왔다. 그는 1908년 3월 21일 워싱턴으로 가던 중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현지 신문에 일본의 한국침략정책을 찬양하는 발언을 했다.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공립협회 등 단체가 있었고 한인이 다수 거주했다. 한인들은 합동으로 대책모임을 갖고 스티븐즈의 망언을 규탄했다. 다음날 대표인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 4인을 페어몬트로 호텔로 보내 이를 정정하라고 요구했다. 스티븐즈는 반대를 했고 이에 멱살을 잡는 등 분위기가 격양되었다.
1908년 3월 23일 아침 스티븐즈가 동부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페리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총소리 세 발이 들렸고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총을 쏜 젊은 애국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스티븐즈는 3일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두 의사의 재판이 시작되자, 한인 사회는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 대동보국회를 통해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구명운동에 나섰다. 1년여의 재판에서 총을 직접 쏜 장인환 의사는 2급 살인죄가 적용되어 25년 금고형을 받았고, 전명운 의사는 90일간의 구금 끝에 풀려났다.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의열 투쟁은 미주내에서 일어난 첫 무력적인 항일운동이었다는 점,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정거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점, 멕시코 이민사회는 물론 전미주에서 7,390달러의 변호비를 모아서 재판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 일본의 한국 합병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알렸다는 점, 미주독립운동 모금의 효시이며 해외에 있던 모든 한인이 힘을 합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다양한 독립운동의 방략(方略)
미주에서 조국 독립운동의 가장 큰 줄기는 외교활동을 통해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활동한 일과 또 하나는 전미주에서 40여년간 모금을 통해서 해외 및 미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을 들 수가 있다. 그 외에 군사활동은 비록 그 뜻은 이루지 못했으나 오랜 기간 준비와 훈련을 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가장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기여는 재정적인 지원을 들 수가 있다.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자금 출처는 동포들의 특별 모금이었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명칭이 바뀌면서 모금이 계속되었다. 특별히 3·1 독립선언 후 독립 의연금으로 이십일조(二十一組)예금(수익의 5%를 냄), 애국금, 혈성금, 국민 부담금 등 일정액을 기쁜 마음으로 냈다. 이 기금은 원동과 구미 각지의 외교 선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지와 군사운동의 경비를 지원하는데 보내졌는데, 배일 운동 때부터 해방 때까지 약 3백만 달러가 모금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미 한인 여성들은 1919년 3·1운동이 전해진 후 하와이와 본토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 때 하와이에서는 '부인구제회'가, 그리고 중가주에서는'대항여자애국단'이 결성되었다.
한인 부인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을 고기먹지 않는 날, 일본인들이 만들어 파는 간장 먹지 않는 날로 정하고 근검 절약하여 독립운동 후원금을 냈다.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가 애국사업에 바친 후원금이 20만 달러를 넘었고 여자 애국단도 4만 6천 달러를 냈다.
그리고 군사활동은 미국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는데 실질적인 결과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우선 초기 이민 사회에서는 한국에 군인으로 갔다가 온 이들이 5백명 정도가 되어서 곳곳에서 군사훈련을 했다. 멕시코 메리다 지방에서는 승무학교가 있어서 사관을 양성했는데 그 숫자가 118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북가주 윌로에서 6개월간 한인 비행사 양성학교를 설립, 젊은이들을 훈련시켰다. 독립군 공군을 양성해서 일본을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한인들이 첩보 훈련을 위해 미전략사무국(OSS)에 가입했고, 직접 군인으로 나가서 싸우기도 했다.
또한 교회도 한인 독립운동의 한 역할을 맡았다. 교회는 바로 한인공동체의 구심점이자 초기 이민자들의 안식처였다. 한인 지도자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는데 그들은 교회를 독립운동의 지주로 삼았다. 미주의 초기 교회는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기보다는 독립지사를 돕는 일, 단체를 지원하는 일, 모금하는 일 등을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맡았다.
한국 정부는 건국으로부터 광복 50주년에 이르는 동안 모두 41명의 미주지역 독립유공자를 포상했다. 그 가운데 이승만과 안창호, 서재필이 대한민국장을 받아쏙 박용만, 장인환이 대통령장을 받았다. 애국지사 중에서 이승만, 서재필, 장인환, 전명운, 현순, 윤병구, 김진목, 이원순, 정한경 등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안창호는 도산공원에 묻혀 있다.
애족장, 독립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지사는 장기영, 정운수, 조용하, 최영만, 강원신, 강혜원, 김원용, 김현구, 문양목, 송종익, 송헌주, 신광희, 안원규, 안현경, 유일한, 이대위 이병억, 이정건, 장경, 전경무, 정두옥, 정양필, 한시대, 한 장호, 홍언, 황기환 등이다.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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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인사회의 현황
1. 인구학적 특성
2. 지역적 분포
3. 사회·경제적 특성
1. 인구학적 특성
미국의 한인 동포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먼저 인구학적 특성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왜냐 하면 인구학적 요인은 사회 분야의 분석에 있어서 가장 객관적인 자료임에 틀림없고 인구의 크기, 연령, 성, 학력, 가구(家口) 등에 대한 분석은 이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재미 동포 사회의 인구학적 특성으로 우선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인구의 성장 시기이다. 1902년 처음 한국의 이민이 시작된 이후 1905년까지 약 7천 명의 한인 이민자가 하와이에 왔으나 20세기 초반까지의 이민자 수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후 동양 이민에 대한 제한이 뒤따랐기에 본격적인 이민은 1965년 새 이민법이 발효될 때까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는 한국계 이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고 동양계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었기에 미국 사회의 이민에 대한 정책이 다분히 차별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자료는 1950년대와 1980년대에 있어서 이민자들의 출신 지역별 분포에 관한 통계이다(<표 III-1> 참조).
<표 III-1> 미국 이민자의 출신 지역별 분포 : 1950년대와 1980년대(%)
출 신 지 |
1951 ~ 1960 |
1980 ~ 1989 |
아 시 아
남 미
유 럽
아 프 리 카, 기 타
캐 나 다 |
6
25
52
2
15 |
42
42
11
3
11 |
자료 : William P.O'Hare and Judy C. Felt, Asizn Americans: America's
Fastest Growing Minority Group (Washington, 1991), p. 6.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한국 이민은 한국 전쟁에 미국이 참전함으로 해서 약간의 증가가 있었다. 즉 1950년부터 1964년까지 37,063명의 한국 여성들이 미국 군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왔고 1955년부터 1966년 사이에 6,293명의 한국 고아들이 미국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 이민은 아니지만 유학생의 숫자도 증가하여 1945년부터 1965년 사이에 약 6,000명의 유학생이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한국인 의사들의 취업 이민도 1960년대에는 크게 늘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본격적인 이민의 시작은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부터라 하겠다. <표 III-2>는 미국 이민국의 통계자료이다.
<표 III-2> 한국 이민의 연도별 숫자
(단위 : 명)
연 도 |
총 수 |
연 도 |
총 수 |
1960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
1,507
2,165
2,492
6,956
3,811
6,045
9,315
14,297
18,876 |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
22,930
28,028
28,362
30,803
30,917
29,300
28,700
32,320
32,663 |
자료 : 미국 이민국 통계
앞의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65년 이민의 수가 2천명이 넘기 시작하였으며 1969년부터는 그 수가 6천을 상회하기 시작하고 1971년 이후 1만명, 그리고 1976년에 드디어 연간 3만명이 넘었다. 앞의 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1987년에는 35,849명이 이민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1980년대의 한국 이민자의 숫자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적은 수가 아니다. 1980년대 전체를 통하여 한국계 이민자의 수는 베트남, 필리핀, 중국(대만, 홍콩, 동남아 화교 등을 포함)에 뒤이어 제 4위를 점하고 있다(<표 III-3> 참조). 이제 미국의 한인 사회는 상당한 양적 팽창을 통해 그 숫자에 있어서는 일본계 집단과 버금가는 규모로 성장하였다.
<표 III-3> 동양계 이민의 국가별 분포 : 1980 ~ 1989
국 가 |
숫 자(명) |
아시아 이민 *(%) |
베 트 남
필 리 핀
중 국**
한 국
라 오 스
인 도
캄 보 디 아
기 타
태 국
파 키 스 탄
일 본 |
679,378
473,831
433,031
338,891
256,727
253,781
210,724
61,699
59,638
55,900
41,739 |
24
17
15
12
9
9
7
2
2
2
1 |
합 계 |
2,865,339 |
100 |
자료 : William P.O'Hare and Judy C. Felt, Asizn Americans: America's
Fastest Growing Minority Group (Washington, 1991), p. 6.
* 난민의 숫자도 포함됨.
** 대만, 홍콩, 마카오의 중국인과 동남아에서 오는 이민 중 중국계로 분류되는
자 포함.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인구학적 특성을 살펴볼 때는 집단의 성비와 연령 분포를 분석하여야 한다. <표 III-4>는 1958 ~ 1977년까지의 성비를 연령별로 집계한 미국 이민국의 자료이다.
<표 III-4>에 따르면 1958년 이래 매년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았고 동시에 어린 아동의 비율이 높다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는 1960년대까지는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이민 숫자가 많았고, 1962년부터 1983년까지는 미국에 입양된 고아들이 무려 45,142명이나 되는
<표 III-4> 재미 한인 성별, 연령별, 연도별 집계
연령
성
연대 |
계 |
계 |
계 |
계 |
계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
425
427
364
434
361
608
453
404
595
1,218
1,118
1,873
3,042
5,119
7,218
8,856
11,163
11,868
11,983
12,116 |
765
993
1,143
1,100
1,177
1,972
1,909
1,761
1,897
2,738
2,693
4,172
6,272
9,178
11,658
14,074
16,865
16,494
18,820
18,801 |
217
212
146
205
113
88
131
123
95
127
148
238
392
631
987
1,521
1,814
2,072
2,453
2,065 |
267
395
331
434
209
238
272
248
238
261
309
455
649
1,052
1,675
2,284
2,569
2,867
3,431
3,239 |
81
82
73
78
64
83
77
81
67
144
121
231
348
613
737
1,039
1,451
1,594
1,547
1,560 |
73
84
76
101
76
96
130
93
119
176
171
249
450
704
910
1,039
1,393
1,641
1,533
1,568 |
23
41
37
41
41
69
79
57
80
133
139
194
332
598
922
1,356
1,920
2,268
2,042
2,147 |
39
41
48
61
63
117
156
141
144
256
223
353
556
861
1,202
1,756
2,302
2,500
2,548
2,580 |
46
44
60
53
75
182
80
51
105
194
224
387
695
981
1,405
1,633
1,856
2,099
2,236
2,373 |
322
402
560
344
595
1,198
1,071
939
937
1,327
1,356
2,131
3,090
4,176
4,743
5,109
5,959
5,161
6,082
6,335 |
연령
성
연대 |
30 ~ 39 |
40 ~ 49 |
50 ~ 59 |
60 ~ 69 |
70 ~ 79 |
80이상 |
미확인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
43
36
38
40
57
157
63
71
208
516
387
654
935
1,828
2,307
2,228
2,634
2,328
2,165
2,132 |
50
60
113
94
119
282
234
257
349
588
494
761
1,153
1,830
2,202
2,378
2,966
2,666
2,562
2,561 |
8
8
3
7
7
20
9
8
28
80
60
117
183
300
529
697
1,009
969
906
1,018 |
12
8
11
10
11
16
25
13
22
65
63
108
196
309
470
640
880
854
894
965 |
6
3
4
3
1
4
6
4
6
13
18
32
72
97
170
227
293
325
349
429 |
1
-
3
3
9
11
9
7
18
34
45
63
99
131
247
433
403
378
521
595 |
-
-
3
5
2
5
5
2
3
9
15
18
25
51
85
137
147
167
225
302 |
-
1
1
2
4
11
5
12
18
28
21
40
64
83
151
303
310
325
402
582 |
-
1
-
2
1
-
1
1
3
2
-
2
8
18
17
25
34
42
50
84 |
1
-
-
-
-
3
5
1
2
2
8
11
13
29
51
71
75
89
111
164 |
-
-
-
-
-
-
-
1
-
-
-
-
-
2
2
3
5
4
6
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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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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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
1
3
-
2
3
7
11
8
13
14
12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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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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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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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료 : 이광규, {재미 한국인}, 1985, p. 72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5세 이하의 입양아 중에는 여자가 많았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겠다. 1970년대 이후에도 여성의 이민자수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미국으로 먼저 이민 온 남성들이 배우자를 한국에서 구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에 그렇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표 III-4> 또한 재미 동포 집단의 인구 가운데 남자의 경우 20대와 30대에 분포된 숫자가 월등히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미국으로의 이민이 노동력이 왕성한 청년기의 사람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 연령에 따른 이민의 경향은 1960년대 전반까지는 연소자가 다수를 점하였으나 1970년에 들면서 전 연령층으로 그 분포가 넓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60세 이상의 노년층도 증가세를 보인다. 이는 가족이민 등이 증가하고 이민자들이 정착해 감에 따라 재미 한인 사회의 인구 구조도 점차 정상적인 분포로 그 방향을 잡아가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국계 이민의 분류를 미국 이민국의 기준으로 살펴 보면, 1960년대까지는 전문직이나 미국이 필요로 하는 직종의 직업을 확보하여 이주해 온 경우(1966 ~ 1968년에는 이러한 부류가 한국계 이민의 73%)가 많았으나 점차 미국 시민권자와 영주권자의 친척과 직계가족 초청 이민으로 바뀌어 간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1977년 한국계 이민자의 91% 가량이 가족 및 친척의 초청이민으로 바뀌었다.
한국계 이민의 다른 하나의 특징은 상대적으로 높은 그들의 교육 수준이다. 1970년 미국의 인구조사 자료를 살펴 보더라도 이것이 잘 드러나고 있다. 1970년 25세 이상 성인들 가운데 4년제 대학을 마친 인구비율은 한국게 36.3%, 중국계 25.6%, 필리핀계 22.5%, 일본계 15.9%, 백인계 11.6%, 그리고 흑인계가 4.5%로 한국계의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통계청의 1980년 인구조사에 기초하여 발표한 자료에 따라서 한국계 이민자들의 가구주를 성별로 보면 남자가 가구주로 된 가구가 72.0%, 여자가 가구주로 된 가구가 11.2%, 그리고 독신자 가구가 16.8%라 한다. 이는 다른 아시아계 이민 집단에 비했을 때 남자 가구주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서 (필리핀 70.9%, 베트남인 69.5%, 일본인 60.7%, 백인 63.4%, 흑인 42.7%) 가족이 미국에서도 한국에서와 같이 강한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상과 같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재미한국인}이라는 저술을 펴낸 이광규 교수는 재미 동포 사회의 인구학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재미 한인은 최근 크게 증가한 새로운 이민 집단으로서 이민 역사가 짧은 만큼 평균 연령이 비교적 낮다. 재미 한국인은 가족 수가 다른 집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고 부계 가족이 많으며 교육 수준이 높다. 그러나 교육 수준에 비하면 재미 한국인은 다른 아시아계 소수 민족보다 고용에서 불리하고 수입 면에서도 뒤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인도, 홍콩, 필리핀 등지에서의 이민자들은 언어의 문제가 비교적 적으나 한국계 이민자들은 문화가 다르고 특히 언어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90년대에 들어서 미국으로의 이민은 주춤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 성장으로 인하여 이민에 대한 매력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최근 미국 내에서 일고 있는 반이민 무드에 대한 소식은 미국 사회에 대한 불안한 전망으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이민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반영이나 하듯 최근 <워싱턴 포스트>지(1995년 5월 6일자)는 "근면과 성실로 미국의 도시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해 온 한국인 소상인들이 갈수록 악화되는 영업 환경으로 인해 많은 수가 도산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미국을 떠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1991년과 1994년 사이에 뉴욕에서만 매년 약 1천 가구 정도가 한국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1980년대 절정에 이르렀던 미국으로의 이민이 이제 줄어든 추세로 접어 들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2. 지역적 분포
외무부가 집계한 재외동포 현황에 의하면 1995년 1월 1일 현재 미국의 총 교포 수는 (일시 체류자를 포함하여) 1백 80만명에 달한다. 교민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한인들은 미주 전지역에 분산되어 있지만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50만명, 뉴욕 지역에 45만명, 시카고 지역에 22만명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13만명 등으로 특히 서부 지역에 편중되어 있고 중부와 동부의 대도시 지역에 많이 거주하는 '도시형 거주 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에는 올림픽 불러바드를 중심으로 웨스턴 애비뉴, 후버스트리트, 윌셔 불러바드, 피코 불러바드 등에 걸쳐 한인 상가 밀집지역이 형성되어 코리아 타운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계 이민자들은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등지에 많이 몰려 살고 있어 캘리포니아와 뉴욕 그리고 일리노이주가 한국 이민자들에게는 가장 선호되는 주들이라 하겠다. 1977년도 미국 이민국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으로의 모든 이민자들 중 65%가 다음의 5개 주에 정착한다고 한다. 이는 캘리포니아 21%, 뉴욕 19%, 플로리다 12%, 뉴저지 7%, 일리노이 5%로 나타난다. 한국계 이민자들의 경우에는 오직
<표 III-5> 미주 한인의 지역적 분포
지 역 |
남 |
여 |
합 계 |
지 역 |
남 |
여 |
합 계 |
워싱턴D.C.
버지니아
매릴랜드
뉴 욕
뉴 저 지
켄 터 키
델라웨어
펜실베이니아
커네티컷
서버지니아
남가주(LA)
아리조나
뉴멕시코
네 바 다
플로리다
푸에르토리코
버진아일랜드
매사추세츠
버 몬 트
메 인
로드아일랜드
뉴헴프셔
북가주(SF)
콜로라도
유 타
와이오밍
워싱턴
오 레 곤
아이다호 |
486
17,826
18,220
76,489
30,674
2,667
1,077
23,148
4,757
722
221,254
5,312
1,314
7,202
4,853
21
15
10,609
135
291
511
198
56,687
8,380
2,971
180
37,908
12,720
155 |
490
20,322
17,521
79,651
39,735
2,705
1,044
23,468
4,724
617
197,562
4,270
998
5,040
8,047
25
25
8,606
176
287
315
173
47,855
7,853
2,914
154
34,992
11,280
145 |
976
38,148
35,741
156,140
70,409
5,372
2,121
46,616
9,481
1,339
418,816
9,582
2,312
12,242
12,900
46
26
19,125
311
578
826
371
99,542
16,233
5,885
334
72,900
24,000
300 |
몬 태 나
일리노이
미 시 간
오하이오
인디애나
위스컨신
미네소타
미주리
아이오아
켄사스
네브라스카
사우스다코다
오클라호마
노스다코다
텍 사 스
괌
아 칸 소
사 이 판
루이지내아
조 지 아
미시시피
앨라배마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테 네 시
알라스카
하 와 이
미령사모아 |
16
55,419
10,287
6,377
3,092
2,791
3,501
1,937
1,420
1,911
1,004
369
3,105
261
37,510
2,964
620
1,043
1,215
14,300
700
1,690
1,800
3,585
2,260
2,914
4,110
90 |
14
57,680
11,074
7,021
3,107
2,883
3,590
2,075
1,697
2,010
1,113
392
3,100
288
35,400
2,352
850
970
1,100
14,100
677
1,730
1,790
3,785
2,340
3,131
4,230
70 |
30
113,099
21,371
13,398
6,199
5,674
7,091
4,012
3,117
3,921
2,117
761
6,115
549
72,910
5,316
1,470
2,013
2,315
28,400
1,377
3,420
3,570
7,370
4,600
6,045
8,340
160 |
자료: 주미 대사관 자료, 1994. (체류자는 제외)
50% 미만만이 상기의 5개 주에 정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캘리포니아 24%, 뉴욕 8%, 일리노이 7%, 하와이 5%, 텍사스 4%). 이는 한국계 이민자들은 이민 전체 평균에 비했을 때 보다 광범위한 지역으로 분산하여 정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재미 한국인의 경우 로스앤젤레스 등 몇 지역에 한인 집중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그 집중율은 타민족에 비해 낮은 편이며 미국 50개 전 주(州)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표 III-5> 참조).
재미 한국인들이 지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거주하는 이유를 사회학자 유의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이민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차이나타운이나 리틀도쿄와 같은 민족 거주 지역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70년대 이후부터 로스앤젤레스 등지에 한인 밀집 지역이 형성되기 시작함) 둘째, 한국에서 6·25전쟁 및 산업화 과정을 통하여 지역적 이동의 경험이 있었으며 셋째, 교육 수준의 거주 지역의 분산은 상관 관계가 있고 넷째,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많았던 국제 결혼으로 이주해 온 여성들과 입양아들이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정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주 지역의 분산은 미국 같은 다민족 사회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 다른 민족들과의 접촉을 촉진시켜 준다는 점에서 장점이 될 수 있으나, 유의영 교수는 또한 불리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거주지가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 집단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고, 정치적 세력화를 못하면 한인 사회가 소외되기 쉬우며, 지역적 구심점이 없으면 자라나는 세대에게 한국적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 불리하다는 것이다.
재미 동포의 거주 지역 및 지리적 이동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한인들은 지리적 이동이 매우 활발한 집단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로스앤젤레스에서 유의영 교수가 행한 조사에 의하면, 전형적인 이민자는 코리아 타운과 같은 인종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에 처음 정착하여 미국 생활을 익힌 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가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따. 즉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은 처음 로스앤젤레스의 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6개 우편 번호 지역 내에 정착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그 곳에서 5년 이내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89%에 달했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계 이민을 아직까지는 사회적, 지리적 상승 이동을 하고 있는 집단으로 간주하는 것이 크게 틀리지 않는 것 같다.
3. 사회·경제적 특성
한국계 미국인의 사회적 특성
미국에는 중국 다음으로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다른 나라의 한인 동포사회와 비교할 때 재미 동포사회의 다른 점은 중국, 구소련, 일본에서는 대부분 2세와 3세 즉, 이민 1세의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데 반하여, 미국에서는 이민 1세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일본 그리고 구소렴으로의 이주는 19세기 말부터 큰 규모로 시작되어 해방 이후 완전히 중단된 반면, 미국으로의 이민은 1965년 미국의 인종 차별적인 이민법이 개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대규모 이민이 시작되었다. 또 한가지 미국으로의 이민이 다른 점은, 해방 이전의 이민은 주로 한말의 실정과 일제의 탄압을 배경으로 농토를 잃은 농민, 강제 동원된 노동자,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가 등이 주류를 이룸으로써, 그들의 이민이 자발적이었다기 보다는 불가피했던 측면이 강하였다. 그에 비하면, 근래 미국으로의 이민은 자발적이고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즉 미국으로의 이민은 이민의 손익을 스스로 따져 보고, 보다 나은 삶과 자녀들을 위한 교육 기회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 따라서 미국의 한인들은 경제적 활동 연령층(25세부터 60세)의 절반 이상이 한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미국으로의 이민은 소위 '중산층의 꿈'을 가지고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으로의 이민은 도시 생활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미국 도시 지역으로의 이주가 주류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로의 이주와 대조된다. 과거 중국과 구소련으로의 이민은 농업 이민의 성격이 짙었고 당시에는 도시화나 산업화 정도가 낮았으므로 대부분은 농촌에서 농촌으로의 이주를 의미했다. 일제하 일본으로의 이주는 대다수가 단순노동을 위한 이동이었기에 한국의 농촌에서 일본의 도시로 이동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일본으로의 이주는 그것이 흔히 강요된 것이었고, 더구나 생소한 도시 생활에의 적응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1960년대 이후 미국으로의 이민은 주로 도시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이 미국의 도시로 이주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한국 이민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1965년 이후에 이주해간 사람들과 그 후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특성 때문에 아직도 그들은 새로운 사회와 문화에 적응해 나가는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이민은 한국에서 이미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도시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미국 대도시의 삶에 비교적 잘 적응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있는 박영수 박사에 의하면 비록 그 표본이 큰 것은 아니지만, 그가 조사 대상으로 한 한인들에게 '미국에 이민온 것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느냐?'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 35%가 '대단히 만족한다', 또 다른 35%가 '그런대로 잘했다'라고 답한 반면, '잘 모르겠다'는 20% 그리고 '후회한다'는 8%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대부분의 재미 한인들은 이민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민 과정이 모두 만족스럽고 순탄한 것은 아니다. 허원무, 김광정 교수가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 등지에서 행한 경험적 조사를 통해 밝힌 바로는 이민 생활의 적응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한다. 제 1단게는 위급 단계(exigency stage)로 이민 초기 1 ~ 2년간이다. 이 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해야 하는 가장 힘든 단계이다. 제 2단게는 해결과 낙관의 단계(resolution/optimism stage)로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정을 이룩해 감에 따라 이민 생활에 자신감도 생기고 희망찬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하는 시기이다. 이 때에는 이민 생활에 보람을 느끼고 생활면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한다. 제 3단계는 침체단계(stagnation)이다. 이민 생활 15년이나 그 이상되는 시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때는 이민 생활이 절정에 도달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없어 실존적인 공허감을 체험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경험은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진급이나 발전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의 사회적 특성을 지적하는 방식은 관점이나 학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쩌면 다양한 집단으로 성장한 한인 사회의 특성을 단점으로 말한다는 것은 현상을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비판받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조정문 교수(1990)는 한국계 이민자의 특성으로 이민 역사의 짧음, 가족구성원간의 유대 강화, 대도시 집중, 그리고 지위 불일치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짧은 이민의 역사
한국계 이민자의 대부분은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된 후에 이주한 사람들이다. 미국의 이민국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1960년까지 공식적인 한국 이민의 수는 6,231명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1961 ~ 1970년 기간 동안에는 그 숫자가 34,526명으로 늘고 1971 ~ 1980년 사이에는 다시 267,638명으로 크게 증가함을 보여 준다. 따라서 한국계 이민자의 대부분은 최근에 이주한 사람들로서 현재 재미 동포 대다수는 이민 1세대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생활 경험이 짧은 한국계 이민자들은 아직까지 한국 문화를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가족구성원 사이의 유대 강화
1965년 개정된 이민법은 시민권자의 직계 가족원 초청의 문호를 개방해 놓았다. 따라서 한국의 이민은 가족의 초청에 의해 이주한 사람이 많고, 동시에 이국 땅에서 당면하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는 데는 가족과 같은 일차적인 집단 및 관계의 유지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자영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투자의 관리 및 인건비 절약 등의 이유 때문에 가족 내지는 친척이 참여하는 가족 사업(family busi- ness) 형태가 많았다. 이러한 요인들은 결과적으로 미국내 한인계 이민자들이 공고한 가족간의 유대를 갖도록 하는 것으로 작용하였다.
대도시 집중
새로운 아시아계 이민들 사이에서도 보이고 있는 특징이지만 특히 한국계 이민자들은 대부분이 도시, 특히 대도시 지역에 집중하여 살고 있다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 미국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계 미국인 중 대도시 지역(Standard Metropolitan Statistical Area)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이 89%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전체 인구의 경우 그 비율은 64%였으니 한국계 이민자들의 대도시 집중 정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위 불일치
한국계 미국인의 사회적 특성 가운데 하나는 많은 수가 지위 불일치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원무 교수와 그의 동료들(Hurh et al., 1978: 20)의 연구에 의하면 조사 대상 이민자 가운데 65%가 한국에서는 전문직 또는 사무직에 종사했으나 이민 후에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30%만이 그러한 직업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대다수의 이민자들이 직업 지위의 하향 이동을 경험한 것이다. 지위 불일치 현상과 관련해서는 특히 많은 학자들이 학력 수준과 직업 지위간의 불일치를 지적하고 있다. 즉 허원무·김광정(Hurh and Kim, 1984)교수의 로스앤젤레스 지역 조사에 의하면 한국 이민자의 3분의 2 정도가 대학 교육을 받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높은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조사 대상자들은 자영 사업, 기계공, 건축공, 그리고 전기공 같은 노동 기술직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이 한국계 미국인들이 전문직, 관리직에 많이 진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언어 미숙, 자격증 취득의 어려움, 전문 기술의 부족, 인종 차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단체의 중요성
조정문 교수가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재미 한인사회에서 종교단체가 차지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꼽을 수 있다. 재미 동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 조직은 종교단체로 그 숫자도 많고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 전통을 갖고 있으며 한국의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986년 통계로는 1,624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현재에는 대략 2천여 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재미동포에 대한 여러 조사에 의하면 교회에 다니는 비율이 70%를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도의 비율이 약 22% 정도인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높은 비율인 것이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미국 사회에서 느끼게 되는 소외감으로 인하여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준거 집단이 필요한데, 교회는 종교적 신앙 활동을 통하여 그러한 마음과 정신의 안정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장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내의 한인 교회들은 따라서 단순히 종교적 기능 이외에도 사교와 친목의 기능을 더하고 거기에 청소년들을 위한 한글 학교운영과 같은 민족 문화 교육의 기능까지 갖는 종합적인 사회 조직인 셈이다.
경제 생활
직업 및 경제 구조
미국으로의 초기 이민은 농업 노동이민으로 시작되었고 1923년 동양계 이민을 차별하는 이민법 발효 이후에는 이민의 숫자가 미미한 것이었기에, 한국계이민자들의 직업 구조 역시 복잡하지 않았다. 1965년 이후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지면서 한국계 이민 사회의 직업도 다양해지고 경제 구조도 그 복잡성을 더해 갔다. 그러나 새로운 이주자들의 대다수가 한국에서는 고등교육도 받고 전문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서 전문직 내지 관리직 직종으로의 진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미 학자 김형찬(1989)이 1986년의 자료를 가지고 분석, 발표한 바에 의하면 재미 동포의 50%는 학생, 주부 및 기타로 분류되어 나머지 50%만의 직업을 분류할 수 있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상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전문직을 가진 사람은 5%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표 III-6> 참조). 이는 한국계 이민자들의 대다수가 이민 1세대이기 때문에 언어의 구사가 자유롭지 못하고 미국의 교육과 자격 제도가 한국의 그것과 다른 점 그리고 미국 사회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인종 차별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이런 경향은 2세와 3세에 가서는 상당히 변할 것으로 보인다.
김형찬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계 이민자들은 대개의 경우, 이민 첫 해나 다음 해에 소규모적인 상업을 시작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동포 상인들의 경우 46%가 이민 첫해에 상업을 시작했으며, 21%가 이민 온 다음 해에 사업을 시작하였다. 사업을 시작하는 자금은 대체로 한국에서 가져온 자본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고, 미국에서 노동 등을 통하여 저축한 돈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은 바, 시카고와 애틀란타에서의 조사에서도 이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반대로 미국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표 III-6> 재미 동포의 지역별 직업
별 첨
미국의 동포들 가운데 상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거니와 그러한 직종의 구체적인 사업내용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남가주지역 한인록에 나타난 업종을 살펴보면 <표 III-7>과 같다.
<표 III-7> 남가주 한인록에 나타난 직업별 및 업소 수(1986년)
직 업 |
업소수 |
백분률 |
직 업 |
업소수 |
백분률 |
제 조 업
건 설 업 |
464
105 |
6.4
1.5 |
페 인 트
기 타 |
81
21 |
1.1
0.3 |
도소매업
무 역
백화점
식품관계
의류관계
화장보석
건축관계
정원관계
전 기
카메라,전자
자동차관계
운공구관계
서적,문방구
악 기 |
513
192
625
164
159
172
116
149
92
285
67
112
38 |
7.0
2.6
8.6
2.3
2.2
2.4
1.6
2.1
1.3
3.9
0.9
1.5
0.5 |
음식식당
숙 박 업
운 송 업
금융,부동산
사업서비스
실내설계
사회서비스
개인서비스
세탁,이발,수선
체육관계
비 영 리
종교관계
계 |
589
56
141
338
255
136
444
643
580
116
190
417
7,260 |
8.1
0.8
1.9
4.7
3.5
1.9
6.1
8.9
8.0
1.6
2.6
5.7
100 |
자료: 김형찬, [재미동포의 현실과 정책과제], {해외동포의 현실과 정책과제}, 국제문
화연구소, 1989, pp. 70~72
<표 III-7>에 의하면 식품 관계 사업과 식당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서비스업으로서 다양한 서비스 업소를 모두 합하면 (세탁, 이발, 수선은 제외) 1,087개소나 된다. 그리고 무역이 513개소로 나타나는데 이는 대부분 한국과의 소규모 무역을 의미하며 조국과의 관계가 사업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가주 지역 동포의 사업은 1985년 당시 연 매상이 5만 달러에서 20만 달러인 경우가 40%나 되고 사업에 고용하는 사람 수도 대부분 3명 이하로 나타나고 있어 사업의 영세함을 짐작케 해 준다.
경제적 적응 과정
미국으로의 이민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지역과 직업에 종사하면서 적응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 적응 과정 또한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와 같이 다양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인들의 다양한 경험과 적응 과정을 직업구조상 낮은 것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서술해 나가는 것은 한국계 이민의 경제적 적응 과정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재미한국인}이라는 책을 펴낸 이광규 교수가 바로 그러한 서술 방식을 채택하여 설명하고 있어 여기 그 내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들 가운데 의사, 간호사, 엔지니어 등과 같이 특정 직종에 종사하기 위하여 온 사람들과 경제력을 갖춘 이주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처음에 노동일부터 시작한다. 단순 노동 중에서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은 청소와 봉제공장 작업과 같은 것들이다. 노동에 종사하는 동포들은 한국에서의 노동 경험이 없고 학력이나 경력에 비하여 낮은 직종에 근무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소규모의 장사를 하려고 한다. 대도시의 노점상이나 시장(swap market)에서의 행상은 적은 자본으로 비교적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장사이며, 실제 상당수의 한인들은 이러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바탕으로 하여 보다 큰 사엄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단순노동과 간단한 장사 이외에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직종은 약간의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직업들이다. 자동차 수리, 전자 제품 수리, 카메라 수리, 하수도 수리 등이 그것이다. 페인터(painter), 정원사, 병아리 감별사, 운전기사 등과 같은 직업에 한인들이 비교적 많이 진출하였다. 이러한 기술은 이민 오기 전에 한국에서 배운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미국에서 직업을 구하고 직장에서 학습하거나 이민정착 훈련과정의 일환으로 기술을 습득한 후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다. 기술직이 아닌 직종으로서 한인들이 상당수 진출해 있는 사무직은 우체국 직원인데, 이는 작업이 반복적인 단순한 것이지만 국가 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국가공무원으로서의 혜택이 있어 선호되고 있다.
재미 한인은 이민 초기에 언어 문제와 사회구조 상의 차이점 때문에 직업상 하강을 경험하지만 3~4년 동안의 과도기가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규모 사업(small business)을 시작한다. 미국 정부의 분류에 따르면 소기업은 100명 이하의 고용인을 가진 업체를 말하며, 그 가운데 5명 이하의 고용인을 둔 소기업을 가족 기업(family busi- ness)이라 한다. 미국의 한인 동포들이 경영하는 소기업은 대부분이 가족 기업에 속하는 규모의 것들이다.
한국계이민들이 운영하는 소기업은 그 수도 많고 업종도 다양하다. 그러나 소기업 중에서도 특히 많이 종사하는 업종은 식품이나 잡화를 취급하는 업종, 의류 장신구 업종 그리고 자동차 관련 업종을 손꼽을 수 있다. 식품이나 잡화는 세븐일레븐(Seven-Eleven)과 같은 편의점, 식료품 가게(oriental market), 주류 판매점, 과일 채소 가게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고 의류, 장신구 업종으로는 1970 ~ 80년대에는 가발 가게가 주종을 이루다가 이제는 장신구, 시계, 문방구, 완구, 의류 등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세탁소와 소규모 봉제 공장을 많이 운영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될 만하다. 자동차 관련 업종으로는 주유소가 가장 많고, 그 외 자동차 수리, 버디샵 등도 많은 편이다. 그 외에 재미 한인들이 많이 종사하는 사업의 하나가 무역업인데 거래선이 한국 또는 아시아 쪽이 대부분인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재미 동포들이 어느 정도 돈을 모으면 진출하는 것이 모텔업이다. 모텔업은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므로 한국에서 이민올 때 사업 자금이 충분치 않았을 경우, 수년 동안 타직종에 종사해서 모은 자금으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도 1980년 이후의 이민자들은 10만 달러까지 지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소기업을 시작하는 시기가 단축되는 경향이 있다. 여하튼 1970년대 이래 재미 동포사회에 있어서 자영업자의 수는 꾸준히 증가해 왔으며 소매업자와 서비스업 종사자의 비율도 증가해 왔다.
재미 동포들의 소규모 기업 종사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점은 그러한 소기업들이 유태인, 이탈리아인들이 주로 하던 가게를 인수받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태인과 이탈리아인들은 한인에 비해 먼저 미국으로 이민온 집단들로서 그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상승 이동을 하게 되자, 그 빈 자리를 한국 이민들이 채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재미 동포들이 소규모 기업 활동을 하면서 상대하는 고객들은 대부분 한국 이민자들이거나 동양인들이지만 동시에 유태인 등이 상대하던 흑인, 히스패닉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이 한·흑 갈 등의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한인들의 소기업이 가족 기업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거니와 바로 그러한 조건 때문에 작업 시간을 매우 신축적으로 그리고 장시간 운용할 수 있게 마련이다. 실제로 재미 한국인들이 소규모 기업을 하면서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비록 상대적이긴 하지만, 성공적으로 적응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다른 민족의 추월을 불허하는 근면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한인들의 가게는 토요일은 물론 일요일에도 연다든지, 또는 미국인들이 주당 평균 40시간 일하는데 비해 한인 자영업자들은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증명해 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재미 동포의 경제적 적응 과정은 실제로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현상에 대한 평면적인 서술에 불과한 것이다. 비록 많은 수의 동포들이 오늘도 이국 땅에서 어려운 환경을 개척해 나가고 있으나, 그 가운데 상당수는 역경을 극복하고 대기업가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례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채영창(1984: 141)씨의 추정에 의하면 재산이 1백만 달
<표 III-8> 재미 동포의 직업
지역
직업 성별 |
관 할 공 관 명 |
뉴욕총영사관 |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
남 |
여 |
총계 |
남 |
여 |
총계 |
농수산업
상 업
제 조 업
요식, 숙박업
기타서비스업
법 조 인
의 료 인
교 육 자
문 예 인
종 교 인
체 육 인
사 무 직
기 술 직
노 동 자
기 타 |
2,086
88,435
1,645
385
11,858
217
801
108
33
1,587
405
2,441
2,835
1,224
25,474 |
1,402
90,008
2,258
811
15,767
18
1,441
78
13
279
17
2,581
517
53
36,701 |
3,488
178,443
3,903
1,196
27,625
235
2,242
186
46
1,866
422
5,022
3,352
1,277
62,175 |
584
34,112
37,520
1,458
58,745
198
780
1,848
586
2,486
452
7,835
19,012
2,813
66,947 |
127
28,152
4,123
980
43,362
25
352
1,013
328
158
42
2,825
2,112
115
123,862 |
711
,62,264
41,643
2,438
102,107
223
1,132
2,861
914
2,644
494
10,660
21,124
2,928
190,809 |
계 |
139,534 |
151,944 |
291,478 |
235,376 |
207,576 |
442,952 |
자료: 뉴욕 및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외무부 통계자료, 1993.
러가 넘는 동포가 500명에서 600명은 된다고 하며, 5백만 달러 이상의 재산가가 로스앤젤레스 지역에만도 50여 명 있으며 1천만 달러 이상되는 사람도 5 ~ 6명 된다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사업가 중의 한 사람은 1984년 1월 23일자 <타임>지에 소개된 황규빈씨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실리콘 벨리(Silicone Valley)에서 '텔레비디오'사를 경여하고 있는데, 1982년 매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직원의 수도 1천 명에 달한다. 그는 거의 빈손으로 유학과 고학으로 공과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의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회사를 차려 독자적인 사업에 성공한 경우이다. 아마 이러한 사례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미국의 꿈이라는 신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성공한 한국 이민에 대한 평가
재미 한인동포는 아직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그들의 대부분이 극히 최근의 이민자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경제적 측면에서의 도약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한국계 미국인들을 특히 흑인이나 멕시코계 집단과 비교해 보면, 흑인과 멕시코계는 그들의 이민 역사가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계 소득에 있어서 한국계 집단에 비해 크게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일부 미국의 언론과 학자들은 한국 이민을 성공적 사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표 III-9>는 최근 미국에 이민한 여러 민족 집단들을 몇 가지 범주에서 비교한 것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이민은 이민 전체의 평균과 비교했을 때 가계 수입이 평균을 상회하고 있고 학력 역시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특히, 가계 수입에 있어 비교의 대상이 된 18개 집단 가운데 7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개개인의 '소득'은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있는가를 나타내주는 중요한 지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 이민의 연평균 가족 수입만을 놓고 본다면, 그들이 극히 최근의 이민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이민 전체의 평균을 훨씬 초과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경제적 적응에 있어 성공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국 이민의 소득은 멕시코 이민의 그것보다 7천여 달러 정도 많고 그리스 이민의 평균 소득보다도 2천 달러 가량 높다. 아마 <표 III-9>에서 보여주고 있는 통계가 한국 이민이 포함된 동양계 이민을 '성공적인 모범 소수민족'(successful model minority)이라고 불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표의 다른 자료는 그러한 성공의 이면에는 남다른 어려움이 있었고 동시에 앞으로도 넘어야 할 장벽 또한 있따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한국의 이민은 영국의 이민과 비교했을 때 높은 교육수준에 걸맞는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언어 장벽과 같은 문화적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민 1세들의 경우 언어 장벽과 더불어 기타 동화문제 때문에 백인 집단 보다 수입이 적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2세나 3세에 이르러 백인과 같은 교육과 경험을 구비했을 때에도 계속된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으로 부각될 것이다.
<표 III-9> 최근 이민집단들의 비교
구 분 |
가계수입
(중위치) |
연령
(중위치) |
가족수
(평균) |
35~44세여인
출산아수
(1,000명당) |
25세 이상
성인중 대학
졸업자(%) |
캘리포니아 거주
(선택) |
집에서 영어만 사용(%) |
인구전체 |
$19,917 |
31.3 |
3.27 |
2,639 |
16.2 |
11.0 |
82.00 |
이민전체 |
$15,224 |
27.4 |
3.81 |
2,571 |
22.2 |
26.8 |
13.00 |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영 국
중 국
인 도
한 국
필리핀
월남1970~74
월남1975~80
캐나다
쿠 바
도미니카
아이티
자메이카
멕시코
남 미
아프리카 |
$16,204
$18,418
$18,939
$25,431
$15,237
$23,935
$18,342
$24,480
$12,026
$15,077
$23,910
$14,510
$9,569
$11,966
$16,094
$11,732
$14,795
$15,109 |
30.4
30.5
28.7
29.5
37.0
29.8
27.5
31.1
22.3
27.3
25.9
40.3
26.0
28.9
26.6
23.6
27.6
27.8 |
3.60
3.79
3.84
3.20
3.86
3.48
3.85
4.04
4.78
3.58
3.17
3.43
3.70
3.81
3.73
4.39
3.58
3.36 |
1,930
2,480
2,550
1,940
2,390
2,070
2,100
2,010
3,660
2,440
2,040
1,970
3,010
2,740
2,690
4,340
2,180
2,220 |
10.6
8.3
2.8
30.5
27.6
63.1
31.6
47.9
11.2
18.5
30.0
10.3
3.4
9.5
9.7
2.7
18.3
43.3 |
11.1
9.3
31.2
9.9
38.2
15.7
27.4
43.8
31.9
31.9
27.4
8.0
1.0
1.7
4.5
43.4
17.4
10.6 |
2.80
3.20
1.00
83.50
1.00
6.60
8.40
3.40
1.90
16.40
65.00
0.80
0.90
2.10
8.50
0.80
13.20
16.90 |
<출처> James V. Koch 1987, "The incomes of recent immigrant: A look at
ethnic diferences, "Social Science Quarterly 68: 2: 299.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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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인사회의 생활
1. 경제와 정치
2. 가족과 종교
3. 문화와 교육
4. 1.5세 및 2세
5. 한국과의 관계
6. 자랑스런 한인 후예들
1. 경제와 정치
경 제
한인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비율은 한 조사에 따르면 남성은 85.3%, 여성은 63.3%를 나타내고 있어 미국 평균의 남성 취업률(77.1%)과 여성 취업률(50.3%)보다 높다(백숙자, 1991:268). 특히 한인들의 자영업 비율이 아주 높은데 민병갑(1991a)의 조사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한인들은 53%의 세대가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뉴욕 거주 한인의 경우 61%의 결혼한 남자와 49%의 결혼한 여자가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 뉴욕의 경우, 남녀 각각 25%, 36%가 한국 가게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고, 미국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도 14%정도 된다. 미국 전역을 고려하면 한인취업자들의 40% 정도가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민병갑, 1991a: 61 -2:1991b:120), 이러한 이유로 한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자영업 비율이 높은 민족으로 보고 되고 있다(Washinton Post, 1995).
이렇게 높은 비율로 자영업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는 첫째, 한인 이민 1세들이 영어에 어려움이 있어 미국 회사 등에 취직하기 힘들며, 언어 문제나 인종 차별 등으로 직장을 가진 뒤 진급 등에 어려움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영업의 경우는 기초적인 영어만 가지고도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직장보다는 자영업에 훨씬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자영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미국에 올 때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온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호한다. 셋째, 한인들은 다른 이민들보다 상대적으로 고학력이며 또한 나이가 든 후에 이민을 온 경우가 많은데, 직장에 취직하면 낮은 자리를 차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전문직 이외의 직장을 회피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넷째, 한인들이 한국에서부터 장시간의 노동에 익숙해 있고 따라서 자신의 노동을 최대한 이용하여 장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필요로 하는 힘든 가게 즉, 청과상, 소규모 식당, 생선가게 등에서 한인이 뛰어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가족들의 결합력이 미국인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가족을 최대한 이용하여 이들이 모두 가게에서 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인건비를 최대한 절약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미국인들이 하는 가게들과의 경쟁에서 쉽게 이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 입국하여 돈을 모아 가게를 사기까지 한인들은 초인적인 노력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 도착하면 보통 한인 부부들은 같이 나가서 일을 하며 둘이 벌면 한 명의 돈으로는 생활을 하고, 한 명의 돈으로는 저축이나 계에 가입하여 돈을 모으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생활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최대한의 내핍 생활을 하게 된다. 2~5년 정도의 저축을 통하여 5~10만 달러의 돈을 모으면 가게를 시작할 수 있다. 이들이 처음 시작하는 가게는 보통 노동력이 많이 들고 구입비가 상대적으로 싼 편인 간이식당, 청과물 가게, 식료가게, 생선가게 그리고 잡화점 등이다. 한인 가게에서 일한 경험이 있거나 직전 주인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스스로 깨쳐서 가게를 운영하기도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미국에 이민올 때 돈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이민 오자마자 곧바로 가게를 사서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어쨌든 이들은 양질의 노동력과 장시간의 노동을 통하여 돈을 더 모으게 되고 돈이 모이면 보다 편하긴 하지만 자본을 더 많이 투자해야 하는 주유소, 세탁소, 옷가게 등으로 전업하게 된다.
이들은 한국 물품과 관련되 분야의 자영업에도 많이 종사하고 있는데, 민병갑(1991a:66-8)의 표본 조사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 한인 자영업자의 15% 정도가 한국에서 수입되는 가발, 의류, 모자, 장신구 등을 취급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에서 직접 물품을 수입하여 파는 도매상들이었다. 미국의 한인 자영업자들은 주로 청과상, 잡화점, 생선가게, 네일살롱(한국의 미용점과 비슷하나 손톱이나 발톱을 주로 손질해주는 곳), 세탁소, 식품점, 식당(간이 음식판매소 포함), 주류판매상, 주유소, 봉제업, 옷가게, 부동산, 보험업, 전문직 사업(의사, 변호사 등), 청소 용역업, 집칠 용역업, 소규모 건설회사 등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
이들이 가게를 열고 있는 곳은 한인 동네를 제외하고는 주로 흑인 동네나 '라티노'(중남미계 이민들) 등이 사는 서민촌 또는 빈민촌이다. 흑인 동네나 라티노 동네에서는 자본력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은 범죄나 흑인에 대한 멸시로 장사를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또 흑인들이나 라티노들은 자본이 모자라고 한인들에 비하여 경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인 상인들은 이들 서민촌이나 빈민촌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백인동네에서는 인종차별이나 영어 등의 문제로 한인들이 가게를 운영하는 데 여러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물론 빈민촌에서도 어려움을 겪지만 백인 동네에서 겪는 어려움과는 다른 종류로 빈민촌에서는 주로 절도, 강도, 폭동, 살인이나 흑인들의 항의시위 등이 가장 심각한 어려움이다.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워싱턴, 애틀란타, 볼티모어 등에서 한인 상인들이 흑인이나 라티노의 권총에 죽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고 있으며 한인 상인이 흑인을 죽이는 경우도 가끔 보도되고 있다. 또한 흑인들이 한인 가게를 기피하는 등의 여러 가지 한·흑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빈민촌에서 한인이 장악한 영역을 보면 로스앤젤레스의 주류 판매상, 뉴욕의 청과상과 생선가게, 시카고와 필라델피아의 세탁소, 애틀란타의 식품업 등이다. 인구 8백만 명인 뉴욕시의 경우 청과상의 85%, 식료품상의 70%, 네일살롱의 80%, 세탁소의 60%를 한인이 경영하고 있다(Washinton Post, 1995.5.7). 인구 2백만 명인 애틀란타에서는 식품점의 3분의 2를 한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현재 한인 인구가 20만이라고 알려진 뉴욕지역에 1만여 개가 넘는 사업체(가게 등)를 한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며, 미국 전역에 10만에 가까운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한인들이 경영하는 자영 사업체들은 다른 민족의 그것에 비하여 성공률이 아주 높다. 또한 자영업을 하는 이들의 소득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월등하다. 1986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자영업자의 25%가 연 75,000달러 이상, 18%가 50,000 ~ 74,999달러, 37%가 25,000 ~ 49,999달러 그리고 25,000달러 미만이 19%에 이르고 있다(민병갑, 1991:7.5), 하지만 세금 보고를 정확히 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득을 정확히 밝히는 경우는 적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미국 자영업자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보고하는 소득보다 실질소득이 높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득을 올리기 위하여 한인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필자가 1989년 뉴욕시 조사(Yi, 1993)에서 살펴 본 바로는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민병갑(1991c: 145-146)의 조사에 따르면 교포 남편은 평균 주 56.8 부인은 50.7시간을 일하고 있으며 남자의 절반이 60시간 이상 일을 하고 있다. 백숙자(1991)의 조사에 따르면 휴일인 토요일에 일하는 한인들의 비율은 남성 79.9%, 여성 46.7%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국민학교나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방과 후나 방학 기간 동안 부모를 도와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족 전체를 계산하면 미국인들의 두 배 이상 경제 활동에 참여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이민자들이 한 곳에 집중하여 살게 되면서 한인 상점이나 거주지가 모여 있는 한인 타운들이 등장하게 된다. 특히, 미국처럼 민족들이 구분되어 거주지를 형성하는 경향이 심한 곳에서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자신의 민족이 있는 곳에 정착을 하게 되어 자신들의 집중 거주지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한인들의 집중 거주지에는 한인을 상대로 하는 한인 영업자들이 집중적으로 모이고 한글 간판으로 한 지역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속의 한국을 연상시키게 된다. 뉴욕의 경우에는 맨하탄의 26번가에서 32번가 사이에 한인 도매상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한인 타운을 형성하였으며, 뉴욕시의 플러싱 지역에는 한인들의 집단적인 거주지가 형성되고 이들을 위한 상점들이 집단적으로 몰리게 되어 한글간판을 단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경우에도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한인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한인들이 압도적인 인구를 가진 것이 아니고 중국인들이나 다른 민족들도 많아서 한인만의 지역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한 이유 가운데에 하나는 한인들은 가게를 하여 돈을 벌면 대개 백인들이 주로 사는 교외지역으로 이사하기 때문에 시내에 한인이 다수가 되는 한인촌이 형성되기는 쉽지 않다. 중소도시의 경우에는 한인의 수가 적기 때문에 특별히 한인 타운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분산되어 사는 경우가 많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 다음으로 많은 것이 자영업체나 공장 등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 식료품점, 가게 등의 종업원 또는 조그만 봉제공장, 건설회사, 청소회사, 페인트 회사 등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들 직종은 대부분 영세한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미국의 중대기업에 비하면 노동조건이 열악한 편이다. 그리고 종업원, 직원들의 일부가 불법체류자이거나 영어를 모르고, 또하나 미국법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하여 일부 한인 가게 주인들은 매상을 줄여서 보고하며 이를 위해 종업원이 적거나 없는 것으로 보고하는 경우가 있어 이들 종업원은 여러가지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세금 보고를 하지 않아 임금도 현금으로 주고 건강보험료, 사회보장세 등을 낼 수가 없어 직장일을 하는 데 따른 건강보험, 실업수당, 은퇴 후의 연금 등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시간외 근무나 휴일 근무에 대해서도 법에 따른 초과수당을 지불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을 통해 권리를 신장할 수도 있지만 한인 가게주들은 이러한 노동조합의 설립, 또는 노동조합에의 가입을 싫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이민당국이나 노동법 관련자들이 한인 공장 등을 조사하러 오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예를 들어 한인이 운영하는 캘리포니아의 대형 여성의류업체인 칼 엔더슨사 및 일부 백화점에 의류를 납품해 온 봉제공장 '트윈패션'이 불법 입국자를 고용하고 법정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노동관련 법규를 위반한 것으로 캘리포니아 주 노동당국의 단속에 적발됐다. 종업원들에게 세금 공제 계산서를 발행하지 않았고 종업원 보험증권도 구입하지 않았다. 한 수사관에 따르면 이같은 상황은 봉제업계에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라고 한다(중앙일보, 1995.9.4). 물론 한인들이 운영하는 많은 자영업체들이 가족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소규모이기 때문에 이러한 규제들을 일일이 알 수도 없고, 규제를 모두 따를 능력도 부족하다. 한인들이 운영하는 업체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러한 문제들은 더욱 더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자영업을 하는 경우나 또는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 다음으로는 전문직 종사자가 많다. 물론 자영업자 중에도 전문직이 존재하는데 의사, 변호사, 보험, 부동산과 같은 전문직종은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한인 자영업체의 12%에 달한다. 이들은 한인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물론 병원이나 법률회사, 연구소 등에 취직한 전문적 직업인들은 주요 접촉 진단이 백인들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는 의사나 간호사가 일찍부터 취업 이민을 와서 상당히 많은 수를 점하고 있다. 미국 전역에 한인 의사는 약 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숫자는 외국인으로서는 필리핀이나 인도계 다음으로 많은 것으로 이들은 한인들의 건강관리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다른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도 한인과 많은 관련을 맺고 있다. 대학 교수들의 경우 문과영역에 종사하는 교수들의 일부는 한국이나 또는 미국내의 한인을 전공 영역으로 하고 있다. 회사의 고위직에 진출한 사람들의 일부도 그러한데, 예를 들어 코카콜라의 미주 지역 아시안시장 총책임자인 이동 씨를 들 수 있다. 특히, 식료품 제조업체들은 아시아인들이 식품소매와 관련된 영역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 (한인 식품상만 2만 명이 넘는다) 아시아인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이다. 한인이나 아시아인을 다루는 전문직에 진출한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한인 사회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인 사회를 대변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이들 전문인들도 한인 사회를 잘 알고 있어 자신의 전문영역으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한인과 관계가 없는 영역에서 사업이나 회사 임원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 플로리다주의 DSE방산회사의 대표인 신대용씨(연 수천만 달러의 매출), 캘리포니아주의 텔레비디오사의 대표인 황규빈씨, 캘리포니아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 시스템의 이종문 회장(연 2억 달러의 매출), 미국 현지 법인인 이토추 인터내셔널사의 최정우 회장 (미국의 일본종합상사 법인 중 5년 연속 순익 1위) 등 한인과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성공한 사업가들이나 전문가들도 많다. 특히 인간관계보다는 그 분야에 대한 능력이 중요한 과학 분야에서는 많은 한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직장을 가지지 못했거나 임금이 최저 생계비에 미달하는 한인의 경우도 많다. 한인 가운데 자영업자의 소득은 좋은 편이지만 일반 노동자나 가게 점원들의 소득은 많지 않은 편이어서 한인 전체의 평균소득은 아시아인 중에서도 낮은 편에 속한다. 특히 한인들 가운데 10% 이상의 사람들이 미연방 최저생계선 밑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한인 타운을 떠돌아 다니는 거지들도 존재하고 있다. 노인들 중에는 정부에서 주는 적은 연금으로만 생활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한국에서보다 부부의 이혼률이 높기때문에 혼자 수입으로 자식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의 소득은 자영업을 하지 않는 이상 높지 않기 때문에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한국에서보다 장려되고 있고 기회가 많아 한인 여성들의 경제참여가 아주 높다. 한인들의 경우 주로 가족이 종사할 수 있는 자영업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부가 같이 일하는 경우도 많다. 자영업에 종사하지 않는 경우에도 보통 부부가 모두 나가서 일을 하여 저축한다. 이러한 이유로 한인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1980년의 경우 한국의 거의 두 배에 이르고 있으며 미국 여성의 평균 경제활동 참여율보다도 높다. 특히, 한인 기혼 여성의 경우 미연방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18.8%)의 거의 세 배(56.0%)에 이른다. 인터뷰에 의한 현장 조사에 따르면 정부 보고보다 높아 기혼 여성의 70%가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민병감, 1991c:140-142). 그러나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여자들은 자녀 교육과 집안 살림에 집중하는 현상이 나타나 미국거주 기간이 길어지면 점차 여자들의 노동참여율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같은 종류의 영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혹은 같은 지역에서 영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경제단체를 조직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먼저 각 지역에 따라 한인 상인회나 번영회를 조직한 경우가 많다. 뉴욕시 할렘의 경우 상당히 일찍부터 지역 상인회가 조직되었는데, 처음 한인이 이곳에 진출한 것은 1970년대 가발을 행상으로 팔기 위해서였고, 1974년에는 가발 가게를 열었으며 점차 다른 직종으로 확장하였다. 이들은 1977년 상인 번영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으며, 힘을 조직화함으로써 지역 문제(예를 들어 흑인과의 갈등, 경찰과의 관계, 지역 사회와의 협조 등)에 조직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할렘에는 130여개의 상점이 있는데 이들은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상인회를 조직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흑인과의 갈등에 대처하고 있다(하동수, 1991: Yi, 1993). 이러한 지역상인 번영회, 또는 상인회는 미국의 대부분의 지역에 있어서 한인 상인들이 집중하여 있는 곳에는 조직되어 있다.
업종별 조직도 일찍부터 발달하여 왔는데 뉴욕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청과상의 경우, 뉴욕시 전체를 포괄하는 청과상조회가 1974년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900여명이 가입하고 있는데, 뉴욕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이며 회원들이 가지고 있는 도매상과의 문제, 시나 주의 행정이나 세금과 관련된 문제, 소비자, 주로 흑인과의 갈등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있다. 이를 위해 주나 시정부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여 왔으며, 흑인 지도자들과 자주 접촉하거나 방송과 신문에 견해를 밝히는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회원 상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단체 건강보험 가입, 장학금 제도, 회원들의 길흉사에 부조 등을 행하고 있으며, 뉴욕에서 전체 한인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는 한인 페스티발이나 퍼레이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물론 생선을 소매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산업 협회, 세탁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협회, 네일 가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협회, 도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협회 등 수많은 직종별 단체가 존재하여 한인들의 경제 및 사회 활동을 돕고 조직화시키고 있다(하동수, 1991). 로스앤젤레스의 경우에도 미주 한인 봉제협회, 남가주 한인 세탁인협회, LA 한인 무역협회, 여성 경제인협회, 가주 자동차 사업협회, 남가주 한인 식품 및 주류업자협회, 한인 여행사협회, 한인 관광협회, LA 한인 농업인협회, 재미 한인서적상협회, 남가주 주류 소매상협회 등이 조직되어 있다(유의영, 1984).
한편, 한국의 경제는 상대적으로 좋아졌으나 미국의 경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상대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한국으로 역이민 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전문가 뿐만 아니라 자영업에 종사하는 경우에도 역이민을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영업의 경우 정부의 높은 세금, 각종 규제, 범죄, 과잉 경쟁으로 자영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어 뉴욕시의 경우 1991년에서 1994년 사이에 1,600개의 한인 가게가 문을 닫았다. 물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가게를 다른 곳에서 열지만 일부는 가게의 권리금과 임대료가 지난 10여년 사이에 수 배나 뛰었기 때문에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요즈음 뉴욕시에서 해마다 1,000가구 정도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많은 빈민지역에서 한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공동화(空洞化)된 지역의 경제를 활성화시켜 놓았으나 한인이 떠남으로 해서 다시 공동화되는 현상도 생기고 있다(Washinton Post, 1995.5.7).
정 치
한인들의 가장 중요한 정치 문제는 한인 사회내의 조직관계, 흑인과의 관계, 미국 주류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한국정부와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한국정부와의 관계는 제4장 5절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미국은 독립 이후 계속 백인들이 지배민족이었고 대부분의 정치 권력을 장악해 오고 있다. 대통령의 100%가 백인이었으며 연방 상원의원도 99%이상이 백인이었다. 흑인이나 아시아인이나 라티노들은 이러한 백인들의 주도권 속에서 여러가지로 차별을 당하며 살아 왔고 또한 그러한 차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인종차별에 대항하기 위하여 각 소수민족들은 인종이나 자기들 민족을 중심으로 뭉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인 사회도 교회와 한인 단체 그리고 종횡으로 연결된 친족 및 사회 관계를 통하여 하나의 전체 한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 사회가 인종이나 민족을 중심으로 분절되어 있음에도 한인들을 묶어주는 전체의 공동체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인종이나 민족을 중심으로 분열상을 보이고 있는 미국을 유지해 온 것은 정당으로서 지난 130여년간 민주당과 공화당이 교대로 미국의 정치를 장악하여 오고 있다. 이들 공화당과 민주당을 위한 각종 한인 단체들이 전국이나 대도시 지역에서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전국 한미 공화당 선거위원회' 등이 조직되어 있으며 선거시에 각지역에서 한시적으로 특정 후보의 후원회 등이 조직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전국단위 또는 주나 시단위 정치인들을 위한 후원회의 결성, 모금운동, 선거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한인 집단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통령 후보 뿐만 아니라 상원의원, 하원의원 등을 위한 모금회를 적극적으로 개최하고 있지만 이들 후보들은 주로 돈만 모아가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이 한인 지도자들을 백악관에 초청한 경우도 있고, 또한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싶다고 밝힌 바 있지만 아직 한인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한인들 가운데 투표권자들이 적고 또한 직접 선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어 미국 정치인들의 선거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하는 사람 수는 아직 전국적으로 10만 명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뉴욕시의 예를 들어보면, 필자가 조사했던 1989년 시장 선거에 참여한 사람은 수백명에 불과하였으며 공화당에 찍은 사람이 민주당에 찍은 사람보다 약간 많았다. 따라서 한인들이 투표권을 사용하여 미국의 정당이나 주, 연방정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한인 단체들은 전체적으로 미국으로 이민온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민자, 소수민족, 노인복지에 우호적인 민주당을 더 많이 지원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투표에 참가한 사람은 아주 적다. 지난 몇 년간의 투표성향을 보면 투표에 참여한 한인들의 경우에는 공화당 지지표가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는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미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작은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복지의 축소로 세금을 감해주려는 정책을 주장하는 공화당을 선호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흑인과의 관계에서 공화당은 흑인들의 시위나 질서 파괴 행위를 민주당보다는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수 한인들이 흑인에 대해 경찰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화당을 점차 더 지지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한인 사회에서 봉사 활동을 추구하는 단체들이나 소수민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민과 소수민족에 우호적인 민주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특히 영주권만 가지고 있어 미국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는 미국 정치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한국의 정치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한인 1세들은 미국정치에 무관심하여 미국정치의 특징인 분산된 권력구조나 정책결정기구의 복합성, 확립되어 있는 미국의 정치 규칙을 자세히 이해하지 못하도 있다(최재형, 1991:101).
미국 정당에의 참여나 지지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미국의 정치에 뛰어들어 후보자로 나서는 한인들도 늘고 있다. 김창준(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부근 다이아몬드시에서 시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를 포함한 지역구에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2회 연속 연방하원의원에 당선)은 연방 하원으로 진출하였으며, 다른 사람들도 하와이주 대법원장, 오레곤주 상원의원, 워싱턴시 시의원, 기타 여러 지역에서 주하원의원이나 시나 군의 선출직에 진출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당선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떨어졌다. 한인 이민의 역사가 짧고 한인의 수가 많지 않아 아직 중요한 도시의 시장이나 주나 연방의 영향력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인들이 교외로 이주하여 분산 거주하는 성향이 높기 때문에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인인 웬디 리 그램의 백인 남편 필 그램은 공화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 경선자로 뛴 바 있다.
한인의 수나 이민 역사의 짧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인 자체보다는 아시아인을 묶는 연계조직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많다. 이를 통해 1,000만명이나 되는 아시아인을 정치세력화하려고 한다. 예를 들러 코카콜라의 미주지역 아시아시장 총책임자인 이동 씨는 재미 아시아인의 단결과 권익신장을 위하여 즉, 아시아인들 정치력을 증대하기 위해 1994년 9월 워싱턴에서 한국, 일본, 인도, 필리핀, 중국, 태국, 베트남 등 7개국 대표를 모아 놓고 '아시아인 총연합회(NAPAC)'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동아일보, 1995.8.24). 이러한 커다란 단체를 만듦으로써 아시아인의 미국 정치계 진출을 보다 용이하게 하고, 또한 아시아인을 위한 여론조성을 보다 조직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미국 정치인들에게 압력단체로서 보다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초창기이기 때문에 아시아인의 연합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개개의 아시아 민족들은 수가 적어 정책에 있어서나 직장 등의 대우나 진급에 있어서,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차별을 감수하고 있다.
흑인과의 갈등은 한인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겪게 된 가장 심각한 인종 문제이다. 미국과 같이 인종 차별이 계속 존재하여 온 사회에서는 새로운 인종이나 민족이 이민으로 미국사회에 편입되는 경우, 이들이 인종적 위계질서의 어느 곳에 속하여야 하는가 또는 속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근본적으로 미국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계층이 부자, 중산층, 가난한 자로 분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제적 분화는 상당 부분 인종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흑인들은 과거에는 농업노예이거나 소작농이었지만 산업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1900년대 이후 도시로 이주하여 하층 임금노동자나 실업자로 존재하여 왔다. 1960년대 이후 흑인들의 중산층이나 전문직으로의 진출이 그전에 비하여 증가했으나 이들은 교외로 이주하여, 도시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하층 임금노동자이거나 실업자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다.
한인들이 이민을 온 후 가게를 흑인 동네에 여는 경우가 많아 흑인들은 이민온 지 얼마 안 된 한인들의 경제적으로 자기들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는 점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고 있다. 일부 흑인들은 물론 한인이 부지런하여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흑인들은 인종 차별 때문에 흑인은 성공할 수 없고 한인들은 은행이나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성공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즉 미국의 인종차별 때문에 한인은 사업을 할 수 있게 되고 흑인은 밑바닥에 계속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인들이 백인들에게 인종적으로 우대를 받고 있다고 믿는다. 또한 일부 흑인들의 시각에 따르면 인종차별 때문에 한인 이전에는 유태인이나 이탈리아인이 흑인지역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하였지만, 흑인들만이 자기지역에서조차 성공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Yi. J. 1993).
한인들이 흑인동네에서 상업을 하는 과정에서도, 흑인 거주민들과 한인 상인들 사이에는 상호 의심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거래활동에서 긴장이 나타나고 있다. 한인 상인들은 흑인들이 물건을 훔쳐가지 않는가 항시 의심을 하고 있으며, 흑인 고객들을 강도나 도둑질을 잘하고 게으르고 열등한 민족으로, 정부보조금에 생계를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흑인 고객들을 거칠게 다루는 형편이다. 흑인들은 한인들이 저질의 물건을 비싸게 팔아 부(富)를 빼앗아 가기만 하고 흑인 동네에는 투자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며(한인 상인들은 대개 백인 동네나 한인 동네에서 살고 흑인 동네에서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한인 상인들이 항시 흑인들을 업신여긴다고 믿는다. 이러한 불신으로 한인 상인과 고객사이에 사소한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이것은 곧잘 한인의 흑인멸시나 흑인들의 쓸데없는 트집으로 간주되어 집단적 갈등으로 확산되는 경우가 많다(Yi, J. 1993).
1990년 뉴욕시의 브루클린에서 한 한인 청과상에 대한 시위가 일년 이상 계속되었으며 1988년 뉴욕시의 할렘에서도 한 한인 청과상에 대한 시위가 일년이상 계속되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한국인 상인인 두순자씨가 쥬스를 훔쳐가던 16세의 흑인소녀를 쏴 죽인 일이 있었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라티노 등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한국 가게들이 집중적으로 방화된 적이 있었다. 시카고, 애틀란타, 워싱턴, 필라델피아, 콜럼버스 등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도 한인 상인에 대한 시위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1993년 9월 볼티모어시의 한 주차장에서 이재환(당시 21살)을 총기로 살해한 혐의로 한 흑인청년이 기소되었는데 배심원들이 이 흑인청년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배심원단 12명 중 11명과 담당판사가 흑인이어서 인종적 편견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인들 100여명이 법원 앞에서 '범인을 처벌하라'고 외치며 재심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한국일보, 1995.8.7).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이든 간에 한인과 흑인이 직접 부딪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한인들이 어떻게 미국정치에 참여하고 어떻게 압력단체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크게 두가지의 견해로 나뉘고 있는데, 첫째는 흑인을 이해하고 소수민족으로서 흑인과 공조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대부분의 주요 한인 단체들이나 사회봉사 단체들이 지지하는 시각이다. 또 다른 시각은 한인 단체보다는 일반 개인들에게서 많은 동조를 얻고 있는 것으로, 흑인들의 부당한 요구나 시위를 백인 정치가나 주나 시정부의 힘이나 경찰력을 동원하여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에 따르면 흑인들을 너무 도와주고 지원해 주면 그러한 것들을 흑인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갈수록 더 요구할 것이라는 견해이다. 1989년 흑인인 딘킨스가 뉴욕시의 시장에 당선되는데 한인들도 선거 활동과 기금모금을 통하여 여러모로 도왔지만 그가 뉴욕시장에 당선된 후 한인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지 않고 오히려 흑인편만 들었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전 흑인 시장인 브래들리가 1992년의 흑인, 라티노 폭동과정에서 한인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은 없다고 생각하여 흑인 정치가들을 과연 지원해 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의 선거에서 한인들이 공화당의 백인시장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한인들은 백인 동네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여러가지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중산층 이상의 백인 동네에는 여러가지 사교 클럽이나 봉사 클럽이 조직되어 있고, 이들은 동네에 누가 들어올 수 있는가에서 부터 동네 관리문제, 아파트 건설, 도로 개설이나 확장, 초·중·고교의 운영, 자녀들의 대학 입학추천 등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인은 이러한 조직에 가입하여 제대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려 해도 기존의 백인들이 훼방을 놓는 경우가 많다. 뉴욕시의 한인들이 처음 청과 도매상에 물건을 사러 갔을 때 백인 도매상과 직원들로부터 많은 차별을 당하였고 생선 도매시장에 한인이 진출하였을 때도 도매상을 독점하고 있던 유태계나 이탈리아계 도매상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지금도 소외를 당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백인 지역에 유도도장을 냈다가 백인의 도전에 포기하여야 했던 한인이 있고, 오하이오주에서는 큰 식당을 냈다가 백인들이 바퀴벌레가 많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손을 들고 나온 경우도 있다. 이러한 차별로 백인지역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이나 백인 영역에 진출한 한인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하고 있다.
한인 사회 내부에서의 정치관계는 각종 단체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뉴욕시의 경우 1989년 직종별 20개, 지역별 20개, 동창회 110개, 친목회 51개 등의 단체가 있다(한국일보, 1990:189). 계(契)와 같이 등록되지 않은 많은 사조직들도 있어 성인 남성의 경우 여러 개의 단체나 모임에 동시에 가입이 되어 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한인회가 코리아타운 중심부에 존재하며 뉴욕시에는 맨하탄의 한인 가게들이 집중해 있는 곳 가까이에 있다. 대도시들의 한인회 단체장을 뽑는데 많은 사람들이 단체장이 되길 원하고 있어 과열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정책보다는 인간관계를 통해 지도자들은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인간 관계를 통하여 한국의 주요 정치인들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더 관심을 쏟기도 하였다. 이제 이러한 점이 많이 개선되어 한인회들이 보다 세분화된 조직을 가지고 미국 현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응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한인회의 전국적 연합조직도 형성되어 있지만 이들의 실질적인 활동은 빈약한 편이다. 한인회 이외에도 한인 상공회의소, 코리아타운 번영회, 각종 전문직에 따른 협회(가령 한인 의사회, 재미 방송인협회, 한국과학기술자협의호, 한인 변호사협회) 등이 조직되어 있다. 각 도시마다 향우회나 각종 학교의 동창회가 광범위하게 조직되어 있어 대부분의 한인들이 이러한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단체들은 참여 한인들의 권익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회원 상호간의 정보교환, 친목, 오락도 꾀하고 있다(유의영, 1984).
그러나 한인 사회내에서의 단체활동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유대 관계에 주로 의존하여 지연, 학연, 혈연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적인 관계가 중요시되는 이유는 아직 많은 한인 단체들이 한인들의 복지증진을 주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정책이나 공약보다는 사적인 관계를 통해 선거운동을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단체들의 지위를 자신의 지위 확인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 때문에 한인 조직들이 공식적인 규칙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단체가 규칙에 의해 공평하게 운영되지 못해 단체장에 당선된 사람의 성향에 의해 활동이 좌우되는 경우가 있어 잡음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단체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특정 분야의 한일 종사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는 경우도 많다.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단체장 중심의 사적 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성향은 한인 조직들에서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1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성향이 강하다.
1.5세와 2세들이 주축으로 구성된 단체들도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미연합회는 주로 한인 사회의 권익보호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어 한인들에게 보다 구체적인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 이들은 한인 유권자들의 선거명부에의 투표인 등록을 적극 권장하여 한인들의 투표에 의한 힘을 강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들 1.5세와 2세들은 1세들의 조직에 비하여 실질적인 활동을 많이 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 주류 사회와의 연계에 많은 신경을 쏟고 있다.
2. 가족과 종교
가족과 친족
처음 미국에 이민 온 한인들은 가족과 친척 등의 초청을 통하여 이민을 온 경우가 많고 이들 가족과 친척을 매개로 하여 직장이나 주거지를 얻기 때문에 보통 도시의 코리아 타운이나 가까운 곳에 살면서 계속적으로 가족과 친척들과 관계를 유지한다. 따라서 같은 도시내에 부모형제나 친척 그리고 친구가 살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시카고에 대한 한 조사에 따르면 77%가 같은 지역에 친척을 가지고 있으며, 70%가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친척과 접촉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친척과 가까이 살기 때문에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타국생활에서 생기는불안도 줄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친척 사이에 갈등, 의존, 사생활 간섭, 경쟁 등의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하여 생활에서의 긴장을 오히려 높이기도 한다(김광정, 허원무, 1991:133-134).
한인들은 수년이 지나면 빠른 속도로 가게 등을 열고 돈을 모으기 때문에, 자식교육을 위하여 보다 나은 학군이 있는 교외로 이주해 나가는 속도가 다른 민족들보다 빠르다. 따라서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코리아 타운이라고 불리는 곳도 차이나 타운처럼 한 민족만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곳은 아니다.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 타운이나 뉴욕의 플러싱에는 많은 한인 가게들과 한글로 된 간판을 볼 수 있지만 한인들은 인구의 절반 이하이다. 코리아 타운이라 불리는 곳도 보통 다른 동양 사람이나 교외로 이사가지 못한 중하층 백인들, 또는 라티노와 같이 사는 경우가 많으나 다른 곳에 비해 한인들이 많기 때문에 코리아 타운으로 불리워진다.
미국 사회에서는 여자를 통한 친척 관계도 남자를 통한 친척관계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처나 누나 또는 여동생의 친인척 관계를 통해 이민 온 사람들이 많다. 특히 초기이민에 있어서 미군 등과 국제결혼을 한 사람들이나 간호사 등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자의 초청에 의해 이민온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여자들과의 관계에 따라 가게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돈을 모아 가게를 장만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누나, 여동생, 딸 등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미국 한인 사회에서는 처계와의 관계가 한국보다 매우 긴밀하며 명절이나 주말에 부계보다 자주 만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자들이 이민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축이나 가게의 설립과 운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친족 가운데 몇몇 친척이나 가족들만이 미국에 이민을 왔기 때문에 이들이 한국에서와 같이 긴밀한 혈통 관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 한국에서도 대가족 관계가 이미 해체되었지만 미국의 한인은 한국에서 보다 더 핵가족화 되어 있다. 대부분 부모와 소수의 자식으로 가족이 구성되는데 할아버지나 삼촌이나 고모들이 합쳐 있는 경우도 가끔 있다. 이들도 대부분 독립을 하기 때문에 핵가족화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서로 방문을 하고 만나는 경우도 부계나 처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몇촌이내의 가까운 친척들이다. 따라서 한국에 비하여 처계가 강화되는 과정으로 한인 사회는 점차 양계(兩系)사회로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여자들도 남자와 같이 가게에서 일을 하지만 집안일을 전부 여자가 떠맡는 경우가 많다. 여성들이 대부분의 음식준비, 설거지, 세탁, 집안 청소, 자녀 돌보기를 담당하고 있으며 남성들은 쓰레기를 치우거나 잔디를 깎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다. 남자들의 경우 아직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은 남자가 해야할 일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 여자들은 남자보다 훨씬 더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들은 이러한 집안일을 가치없는 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자식의 교육은 아직도 주로 아내가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한인 여성들은 경제활동 참여시간이 늘어났지만 가정활동시간은 줄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초인적으로 생활을 꾸려간다고 볼 수 있다. 육체적·정시적 피로가 누적되어 남편에게 가사나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하는 아내들이 많다.
이러한 노동의 강화는 여성의 노동부담을 가중시키지만 또한 여성의 발언권도 강화시킨다. 미국 사회에서는 한국보다 여성의 발언권이 강하다는 인식 또한 여성들을 자극하여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되기도 한다. 더구나 한인 가족들이 여자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민 온 경우가 많고 부부가 같이 장사를 하며, 여자가 집안의 일을 주로 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발언권이 한국에 비하여 아주 강화되어 있다. 바깥에서 자신의 활동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상당한 자아 만족을 느끼지만 남편이 집안에서 자신의 바램만큼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부부간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쉽게 드러나는 경향을 보여준다.
부부의 충돌이 폭력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고 심하면 아내를 구타하거나 학대하여 이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인 여성들의 60%가 남편에게 맞은 것으로 보고되었다(송영인, 1991:297). 부부가 모두 낯선 땅에서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부갈 등을 해소시키기 위한 활동들이 활발하지 못한 편이고 따라서 재미교포들에 있어서 이혼율이 계속 상승하고 있다. 1980년대의 자료에 따르면 이혼율은 교포 남성의 경우 한국 남성의 3배, 교포 여성은 한국 여성에 비해 6배나 높다(민병갑, 1991c:139- 140).
이혼을 경험한 여성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결혼의 실패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심리적 괴로움을 겪고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부분의 한인 여성이 결혼을 하고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을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혼은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이웃들로부터 심각한 사회적 고립을 경험하게 된다. 이혼 후 이들은 문화적, 언어적 장벽이나 기술의 부족 또는 사회 경험의 부족으로 어려움도 겪고 있으며, 부양할 자식들을 데리고 있는 경우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송영인, 1991).
시부모와 아들 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 며느리가 시부모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기보다 평등한 관계를 요구하거나 일한 만큼의 권리를 요구하는 경우가 갈수록 많아져 갈등이 표면화되기도 한다. 갈등이 심화되면 쉽게 부부 갈등으로 변하여 이혼하는 경우가 가끔 나타나고 있다. 혹은 시부모가 독립해서 살고자 하기도 하며, 시부모가 가출하는 경우도 있다. 여자들은 시어머니와의 갈등 때문에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을 선호하며, 특히 부부가 모두 일 때문에 자식을 돌보기 힘든 경우 한국에 있는 친정어머니를 초청하여 같이 사는 경우가 많다.
부부가 같이 생존해 있는 노인들의 경우 복지연금을 받거나 또는 자신의 돈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자식들의 눈치를 보며 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따로 사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 혼자 남아있는 노인들도 독립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으나 경제적 또는 육체적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자식들과 같이 살기도 한다. 노인 전용 아파트 등 노인들끼리 완전히 독립하여 사는 경우가 늘고 있으나, 많은 노인들은 소득이 충분하지 못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건강 문제 등 여러 노인문제도 야기되고 있다. 한인들은 부모를 모시고 효도를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미국사람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모님과 같이 살지 못하더라도 자주 만날 수 있고 일이 있으면 쉽게 찾아가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에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많은 노인들은 자식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이웃이나 같은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다.
또한 남자들의 권위주의적 태도로 인해 미국의 평등주의와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자식들과 갈 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의 경우, 아버지를 중심으로 아버지가 책임을 지고 가족을 운영하여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자식들은 부모라 하더라도 상의할 것은 은 상의하여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식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결혼이나 이성친구를 사귀는데 있어서 부모들은 한인과 사귀고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만, 자식들은 결혼은 당사자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부모들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국제 결혼
미국내에서 한인이 갈수록 다른 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이 높아가고 있지만, 초기 국제결혼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미군이나 미군의 군속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1989년까지 1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국제결혼을 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이부덕, 1991:308). 국제결혼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워싱턴주 시애틀 근교의 타코마, 텍사스주의 오클라호마, 샌안토니오, 킬린 등으로 이들 주에 적어도 만명 이상 국제결혼한 한인이 살고 있다. 캔자스주의 정션, 애리조나주의 시애라비스타, 하와이 등지에도 각각 1,000명 내외의 국제결혼한 한인 여성들이 거주하고 있다(한국일보, 1990:144). 1980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이부덕, 1991:311) 이들 가운데 시민권을 가진자가 60%이고 40%가 영주권을 가지고 있어 다른 한인들보다 시민권을 취득한 비율이 아주 높다. 남편은 85%가 백인, 2%가 라티노, 그리고 0.4%가 흑인이었다. 이들의 남편은 과반수(59.2%)가 현역 군인이고 주로 하사관이나 사병들이며 장교는 16.7%였다.
이들이 그 수에 있어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에 미친 영향은 아주 크다. 1964년까지 미국에 이민 간 한인의 수가 15,000여명인데 이중 7,000명이 미군과 결혼한 사람이고 6,000명이 미국에 입양된 고아였다. 이들이 초창기 친족들을 초청하여 이민을 오게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한 여성이 동생 8명을 초청하고 동생가족이 각자 자기 가족을 초청하여 50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온 경우도 있었다(한국일보, 1990:144).
국제결혼한 한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미국 각지에 흩어져 있어 한인 사회보다는 미국사회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인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주로 미국인들을 접촉하며 살고 있다. 이들은 미국인들 속에서 외롭게(그 지역에서 유일한 한인인 경우가 많으니까)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같은 처지에 있는 주위의 여러 한인 여성들을 만나는 것으로 향수를 달래기도 한다. 이들은 미국인들에게 한인과 한국의 이미지를 직접 전달하는 사람들이고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역에서 한국을 알리는 프로그램이나 봉사활동을 통하여 한국을 미국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오하이오주 도청소재지인 콜럼버스에서 매년 국제문화제 행사를 거행하는데 그 지역의 한미부인회는 한국의 음식, 진열품, 민속춤 등을 소개하고 있다(이부덕, 1991:318). 이러한 한미부인회는 워싱턴을 비롯하여 대도시나 미군 부대가 있는 여러 곳에 조직되어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결혼하여 들어오는 한인 여성들의 미국 생활을 도와주고 한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또한 결혼생활에서의 어려움을 상담하고 해소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으며 정보교환, 경제적 협조(계를 조직하거나 돈을 서로 빌려주고 도움을 받는 것), 미국의 각종 복지단체 등에 소개나 연락을 통해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준다.
국제결혼한 많은 여성들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혼자 고립되어 있어 남편의 학대에도 어쩔수 없이 견디는 경우가 많다. 특히 주변에 사는 미국인들의 편견과 차별로 고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결혼생활에서 이질적인 문화, 외로움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남편이나 시댁의 학대 때문에 가족생활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시가족과의 인간관계, 음식, 자녀양육 등 아주 사소한 생활 하나하나에서 갈 등을 겪고 충돌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2세들이 미국인으로 자라 한국이나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인 엄마를 멸시하여 자식들과 갈 등을 겪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철저한 신앙심을 가지고 한국식으로 시부모나 남편을 잘 섬기기 때문에 시집식구들을 감동시키는 경우도 많으며, 좋은 남편을 만나 부부관계도 좋고 또한 시가족이나 이웃들과 잘 어울려 사는 경우도 아주 많다.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국제결혼한 여성들의 이혼율은 높은 편이다. 일부는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한인들보다 미국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활을 하기 때문에 미국사회에 더 빨리 동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동화는 특히 남편의 협조가 있어야 잘 이루어진다. 워싱턴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소렐 봉선씨의 경우 17세에 미군 하사와 결혼하여 미국에 건너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여 대학 교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한 한국에서부터 대학교육을 마치고 이미 일정한 지위를 확보한 (장교와 같은) 남편을 만나든지, 유학을 가서 결혼하는 경우도 있고 이민 2, 3세들이 다른 민족과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 아직 한인 부모들이 자식들이 한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 타민족과의 결혼 비율은 다른 민족에 비하여 낮은 편이지만 점차 늘어나고 있다. 국제 결혼을 한 여성들 중 높은 사회적 지위에 이른 사람들도 있는데, 연방저작권 및 특허중재위원회 위원장(차관급)을 지낸 신디 도브씨의 경우로 그녀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군대위와 결혼하여 미국에 건너갔다. 그녀의 남편은 네브라스카주의 공화당 하원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1995년 공화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인 필 그램 상원의원의 부인인 웬디 그램여사는 장관급에 해당하는 선물거래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어 동양인으로는 최고 높은 관리직에 오른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지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연방이나 주의 관직을 차지하여 열심히 활동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1.5세나 2세들의 경우 한인들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는데 1970년대 후반의 로스앤젤레스의 통계에 따르면 15~20%에 달하고 있다. 타민족과 결혼하는 사람중 여성이 60~80%를 차지하여 남성보다 더 많은데, 여성들은 백인남성들이 한인남성보다 여성을 평등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쉽게 결혼할 수 있지만 한인남성들은 백인여성을 지배하기 힘들어 회피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물론 백인여성들도 한인남성이 여성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이기 때문에 피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민병갑, 1991g). 미국 내에서의 국제결혼이나 또는 한인 2세들의 국제결혼은 한국에서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보다 훨씬 적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미국문화에 익숙하고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하여 결혼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기대나 적응이 보다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앞으로 이들의 후손들이 한인에 대한 정체성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는 미주 한인사회의 장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입 양
한국 정부는 1961년 해외입양법을 제정하고 국제입양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1987년까지 한국의 해외입양아 수는 10만명이 넘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으로 입양되어 이민을 갔다(한국일보, 1990:155).
이들이 어린 나이에 양부모에 입양되어 초기에는 커다란 충격을 받아 불안해 하며 울고 짜증을 내고 정신적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미국인 부모들의 보살핌으로 한국에 비하여 풍족한 생활을 하였으며, 점차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게 되고 영어와 미국문화에만 익숙하게 된다. 그러나 국민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백인들인 다른 학생들이 외모를 보고 계속 놀리게 되기 때문에 점차 자신이 미국인(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특히, 사춘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한국으로부터 왔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어 고독을 느끼고 한국적인 것을 찾기도 하나 한국과의 관계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다른 한인들을 만나는 경우에도 한국말을 하지 못하고 한국 문화도 전혀 낯선 것이어서 같이 어울리기도 매우 힘들다. 따라서 입양아들은 자신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료들끼리 만나 많은 도움을 서로 주고 받는다.
국제결혼한 여성들이나 입양한 한인들은 다른 한인사회와 어느 정도 분리되어 독자적인 집단을 이룩하여 살아가는 경우가 많으며 미국사회에 흡수되어 한인사회와 별 관련없이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또는 한국이나 한인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표하고 이들을 만나 한국에 대해서 배우고자 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한인들을 회피하거나, 적극적으로 찾아가 만나거나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한국에 대한 향수와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입양아의 대부분이 좋은 양부모를 만나 미국 중류층에서 생활하여 사회에 전문가로 진출한 경우도 많으나, 극소수의 입양아들은 양부모의 학대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미국 부모에게서 자라서 미국사회를 아주 잘 알고 있으며 또한 많은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한인사회로 포용하여 전체 한인 사회의 영향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특히 한인 사회의 2, 3세들도 점차 흡수되어 한인계 미국인으로 미국사회에 정착해가고 있기 때문에 국제결혼한 여성이나 이들의 후손, 그리고 입양 출신들과 협동할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종 교
미국에 사는 70%가 넘는 한인들은 기독교를 믿고 있으며 이러한 비율은 한국에 비해서 아주 높은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훨씬 유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한인들을 고국에서 기독교를 믿었던 비율(약 50%)이 한국 전체의 기독교 신자 비율(22%)보다 월등히 높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미국 이민을 보다 선호하였음을 보여 준다(민병갑, 1991f). 한인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가 많기 때문에 교회가 한인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교회는 현재도 중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고국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았더라도 미국에서는 대부분 교회에 다니게 된다. 한인 친구들이 생겨 타지라는 외로움을 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목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사는 방법에 대하여 교육을 시켜주기 때문이다. 또한 일자리를 구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신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이 외의 각종 문제들을 상담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한인들은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혈연의식과 집단의식을 바탕으로 유대감이 강하고 서로 교환 방문이 빈번하다. 이러한 빈번한 접촉을 통하여 목사를 중심으로 신도들이 영적인 생활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생활, 여가, 정보도 공유하고 경제적 정서적으로 서로 도움을 받기도 하는 등 교회는 한인들의 미국 사회 적응에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한인 이민들에게, 차별당하고 시달리고 피곤한 심신을 극복하고 영적 안정을 얻도록 도와주고 있다.
미국의 교회들이 보통 일요일에 한 번 모이는데 반하여 한인 교회들은 대개 2번 정도이고 많은 경우에는 6번씩 집회를 갖는 경우도 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성서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하지만 한인들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하여 사회적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교회가 설교를 통해 미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말을 전해주고 음식을 같이 하며 서로 일주일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와 회포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설날이나 광복절 등 한국의 명절이 되면 특별 음식을 장만하고 신앙공부를 이유로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단체로 도시 주변의 공원으로 놀러 나가며 영어나 복지 혜택, 학교 등의 문제를 도와준다.
또한 한글학교나 방과후 학교를 개설하고 여름방학 때는 여름학교를 개설하여 저녁 늦게까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역할을 하여 부모들이 사업을 하고 늦게 돌아와도 안심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영적 봉사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적 봉사를 실시하고 있어 한인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인에 대해서만 봉사를 하기 때문에 미국 사회와 단절되도록 하기가 쉽고, 인종 차별문제나 빈곤자의 봉사 등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진다.
교회 장로, 집사, 권사, 청년회장, 부인회장, 성가대 지휘자 등은 한인들에게 중요한 사회적 지위로서 역할을 하게 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한인사회에서 인정을 받음으로써 미국사회에서의 지위부족을 보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직책들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아 내부적으로 많은 갈 등을 겪기도 한다.
한인 교회가 일상생활에 중대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대부분 교회가 설립되어 있다.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높은 믿음으로 한인 300~500명 당 1개 정도로 교회가 설립되어 있어 그 수가 2,000곳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스앤젤레스에 450개, 뉴욕지역에만도 350개 정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민병갑, 1991f: Park, K. 1989).
교회의 난립으로 한인 교회의 평균 교인은 82명에 불과하였다(민병갑, 1991f). 미국의 다른 지역도 비슷한 상황이며 한인 인구가 몇 십명에 불과한 소도시나 읍지역에도 한인 교회들이 미국교회를 빌려서 종교활동을 하면서 그 지역 한인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가 나뉘어져 오히려 한인사회에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각 지역에서 한인 교회의 목사는 그 지역의 한인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면, 그 지역의 한인회가 이러한 갈등속에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군소 신학교가 설립되어 전도사와 목사를 너무 많이 배출하여 목사의 위신이 떨어지고 질이 저하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김용준, 1991). 이들중 일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교인들이 자꾸 나누어지는 일도 나타난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신앙보다 지연, 혈연, 파당 등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한인 교회는 한국적 전통을 많이 가지고 있다. 목회자도 한국에서 목회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이며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편이다. 공원에 가서도 확성기를 틀어놓고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러 미국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고, 집에서 큰 소리로 찬송을 하거나 교회에서도 철야 통성기도를 하여 주위에 사는 미국인들로부터 항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설교도 주로 남성 중심적이고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으며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람보다는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섬기면 복을 받는다는 설교가 많아 기복적인 신앙이 아직 강한 것으로 보인다(유의영, 1984: 192~193).
한인 교회들은 청소년 지도, 한글 교육 등 2세들의 만남과 교육, 신앙 생활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커다란 교회들은 2세들에게 한국적인 신앙심, 예절 한국 문화를 익히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들 2세들은 청소년 전도회나 모임을 통하여 자신들끼리 공동체 의식을 느끼며, 범교회적 청소년 단체를 통하여 한인에 대한 봉사 활동을 강화하기도 한다.
천주교는 세계적으로 통합되어 있어 한인 천주교 신자들은 미국 천주교와 잘 통합되어 있는 편이다. 그렇지만 많은 한인들이 영어로 하는 미사보다는 한글로 하는 미사를 선호하기 때문에 별도의 집회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경우 대개 미국 성당에서 일부 시간에 따로 미사를 드리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한인 천주교 신자들은 미국 천주교 신도의 미사에 한인 개신교 신도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다. 또한 미국 천주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일부 소도시 지역에서는 대도시에 있는 한인 신부를 가끔 초청하여 자체적으로 미사를 드리며 그 외에는 미국 성당에 나가고 있다. 한인 천주교도의 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개신교에 비하여 아주 적은 편이다.
기독교에 비하면 불교는 미주 한인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등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는 여러 사찰이 존재하나 불교도 수는 기독교도 수에 비하여 소수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국 주류사회가 기독교화 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다는 것을 미국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은 사회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미국 사회에 쉽게 적응하기 위해 이왕이면 기독교를 믿는 것이 여러 모로 이익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특별히 불교나 유교에 열성적이었던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사교 장소로나 한인들을 만나는 장소로서 교회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 호놀룰루 등 대도시에 주로 세워진 한인 불교 사원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주로 조계종에 속한다. 이들 사원의 수는 아주 적은 편이지만 착실한 성장을 하고 있으며, 북미전역에 1989년에 약 60개의 절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석구, 1991:242). 불교 사원들은 석가탄신일 행렬 및 잔치, 국악과 한국 무용 등 일반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한국적인 것은 많이 가지고 있다. 삼우나 승산과 같은 일부 한인 승려들은 백인을 상대로 포교 활동을 펴고 있다(이석구, 1991).
통일교는 뉴욕시 맨하탄 43번가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일본과 미국에서 교세를 키워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통일교의 초청으로 북미여행을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미국에서 교포들이 통일교를 믿는 경우는 별로 없다. 미국 사회에서 통일교는 이단의 하나라고 인식되어 있지만 상당수의 미국 젊은이들이 통일교를 믿고 있으며 일본의 통일교신도로 하여금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게 하는 등 국제적인 연계활동에 많은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 통일교는 한국을 선택받은 나라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교도들은 한국에 대하여 아주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
3. 문화와 교육
문 화
사업을 하기 위해 흑인 동네나 또는 시내 중심가, 그리고 도매상이 있는 곳에 나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화생활이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이민 1세들의 경우 저녁에는 한국어로 진행되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경우가 많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경우도 대부분 한국에서 제작된 뉴스나 드라마 등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재방송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 덧붙여 자체에서 제작한 지역뉴스를 방송하거나 토론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이러한 한인 지역방송은 대부분 기존 방송국으로부터 일정한 시간동안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지역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로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공공방송 등 광고를 제한하는 방송의 경우는 비용을 염출하기 힘들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갈증이 아주 심하기 때문에 뉴욕시의 한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은 한국 방송을 24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유료 수신자는 계속 늘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 방영되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비디오로 출시되어 이를 빌려보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드라마의 경우 미국에서도 한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으며, '여명의 눈동자'나 '모래시계'는 미주 한인들에게도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작은 도시나 시골에 사는 한인들도 몇 시간 차를 타고 대도시의 한인 가게에 가서 비디오를 대량으로 빌려다 보는 경우가 많다. 영어로 된 미국 비디오는 아무래도 정서가 달라 쉽게 질리지만 한국 비디오는 한인 1세들에게 저녁시간을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향수를 어느 정도 풀어주는 기능도 하고 있다.
이민 1세의 대부분이 영어 구사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한국의 사정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한인 신문을 구독하는 경우가 많다. 한인 신문은 전부 한글로 구성되어 있거나 영문 간지를 넣기도 한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들이 미국에서도 발간되고 있으며, 위성을 통해 미국에서도 그날 그대로 발행된다. 물론 광고 부분은 미국 각 지역의 지역광고로 채워지며 미주의 소식이나 자기 지역의 소식을 위한 미주판을 덧붙여 가두에서 판매하거나 또는 우편으로 배달한다. 한국에서 발간되지 않는 독자적인 신문도 미국에서 발간되고 있는데 뉴욕의 경우 <독립신문>이 발간되었고, <세계일보>가 한국에서 발간되기전 뉴욕에서 먼저 발간되고 있었다. 미국 전역에 한글로 발간되는 일간지와 주간지, 그리고 격주간지를 합하면 50개가 넘는 것으로 보인다(이성형, 1991:300). 뉴욕만 해도 일간 신문이 5개, 주간 신문이 6개, 월간지가 2개나 발행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신문이 발간되기 때문에 여러 신문들이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경비 등의 문제로 인력이 부족하여 신문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뉴욕에서 가장 큰 동포신문인 <뉴욕 한국일보>도 발간부수가 2~3만부를 넘지 못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1974년 이후, 코리언 페스티발이 한인 타운 중심가인 올림픽가에서 매년 실시되고 있다. 남가주 한인들의 각종 문화, 음악, 예술 활동들이 대부분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에 위치한 수많은 화랑, 극장, 예술관, 교회 등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동창회, 계모임, 사회봉사단체 등의 단체들도 이곳에 집중해 있다(유의영, 1984:176-177). 이러한 페스티발과 퍼레이드는 다른 도시에서도 행해지는데 뉴욕에서도 뉴욕 한인회와 다른 단체들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퍼레이드나 페스티발이 추석 부근의 주말에 펼쳐져 많은 한인들이 하루를 즐기고 또한 미국 사회에 한국 문화를 과시하고 잇다. 특히 한국적인 놀이들이 많이 마련되어 있고 한국에서 유명가수들을 대거 초대하기 때문에 아주 많은 한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조그만 소도시에서도 한인들은 추석이나 설날이면 함께 모여 친목행사를 개최하는 경우가 많다.
한인 지역에는 각종 친목단체나 사교단체들이 형성되어 있다. 의사나 사업가들을 포함한 지역유지들이 참여하는 한인 라이온스 클럽이 로스앤젤레스 등 여러 도시에서 조직되어 있으며 LA 라이온스 클럽의 경우 정기적으로 눈검사, 무료진료, 헌혈운동, 불우이웃돕기 등의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정기적으로 회원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지역의 미국 정치인들이나 또는 미국 라이온스 클럽의 회원들을 초대하고 미국 주류사회와의 접촉을 늘리고 있다. 이외에도 키와니스 클럽이나 여성들이 참여하는 라이오네스 클럽 등이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라이온스 클럽과 마찬가지로 전국적 조직의 한인지부로 존재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어서 한인 봉사회는 한인 전체를 상대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인청소년회관이나 한미청소년후원회 등은 청소년의 선도활동에 주로 봉사하고 있다(유의영, 1984: 200~201). 여성이 주축을 이루는 많은 단체들도 형성되어 있는데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미 교육자협의회', '미주한인간호협회', '한미 여의사협회', '여성 경제인협회' 등이 형성되어 있어 여성들의 활동을 조직화하고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미국의 각지에서 문단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이민문단'이라는 이름이 정착되고 있다. 이들은 동인지를 발간하든지 단행본으로 시나 소설을 발간하고 있으며, 각종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글을 발표하고 있다. 이들은 미주 한인 문인협회를 만들어 <미주문학>이라는 잡지를 내고 있다. 이외에도 <문학세계>, <울림>, <크리스찬 문예> 등이 나오고 있으며 신문에서도 신춘문예를 현상모집하고 있다(한국일보, 1990:183). 또한 교회에서 나오는 책자들에도 신도들이 여러 가지 글을 써서 발표하고 있다. <어메라시아 저널> 등의 미국 잡지에도 한인들이 발표하는 많은 글들이 실려 있다. 한인 이민문학의 특징은 이민 과정에서 생기는 애환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김유미, 1991:373).
한인지역에는 한인 오케스트라와 한인 연극, 화랑 등이 존재하고 있다. 미국 전체에서 음악을 전공한 한인들이 2,0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인 사회가 경제적으로 충분히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 오케스트라는 이름과 지휘자만 있고 정규단원이 없는데 필요할 때만 모여서 같이 연습하고 발표하게 된다. 오페라도 발표하는데 대부분이 표를 사서 들어오는 관객들보다 초청자들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코리아 타운에서는 한국에서 초청하거나 자체적으로 연출한 연극을 공연하기도 하고 한국 영화를 상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인들은 상당수가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기 때문에 음악이나 연극 공연에 참석하기가 어렵다. 교포 화단도 규모는 작지만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100여명의 미술가가 '시몬스 삼일당 화랑', '앤드류 샤이어 갤러리', '현대화랑'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음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그림 자체만으로는 생활을 하기 매우 어렵다. 교포 사회에서는 일제 시대의 종군 위안부에 대한 전시회 등 여러 가지 전시회나 또는 한국에서 온 유명 인사들의 강연도 자주 이루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의 활동보다 교회차원에서의 문화활동은 교포 개개인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모여서 크리스마스나 설날 연극을 하게 하고, 어린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예회를 열며, 성가대를 조직하여 계속 음악을 접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각종 발표를 하게 하여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각종 놀이나 체육대회를 개최하여 신도들이 즐거움을 느끼고 하루를 지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교회들은 자신들의 신도뿐만 아니라 다른 한인들을 위한 여러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미국 주류의 문화계에 진출하는 한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새로운 예술형태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왔으며 판화의 황규백,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프리마돈나로 홍혜경, 신영옥 등이 뛰어난 활동을 하고 있다. 한동일, 얼 김은 한인 2세 작곡가로서 하버드대 교수로 있었으며 뛰어난 곡들을 작곡하여 보스턴 심포니나 뉴욕 필하모닉이 그의 곡을 연주하였다(최인달, 1991:338). 김영욱 등 뛰어난 연주자들도 많으며 젊은 연주자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김은국이 쓴 {순교자}, 요즈음 인기를 얻고 있는 이창래의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라는 소설은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특히 이창래는 재미 한인 3세로 미국의 문화를 충분히 소화하고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완전한 미국인이 될 수 없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화하고 있다. '마가렛 조는 못말려'도 재미 한인 가족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 드라마로 미국 전역에 인기리에 방송되었다.
교 육
재미 동포들은 자주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식들을 잘 교육시키는 것을 들고 있다. 미국으로 이민 오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교육열을 그대로 가지고 올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식들을 한국에서보다 더 좋은 학교에서 더 잘 교육시키기 위해서 온 사람들도 많다. 이들에게는 자식들이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느냐 하는 것이 자신들이 이민 온 목적을 달성하였는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특히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은 좋은 직장이나 출세에 필수 조건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식은 미국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모든 고통을 감수하며 사회적 지위가 낮아짐에도 불구하고 낯선 나라에 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자식들의 출세로 이를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는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성공하는 것은 자식 개인에 고나한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명예에 관한 것이다. 특히 자식들이 사회에서의 전문직, 의사, 변호사, 과학자, 대학 교수 등의 영역에 진출하여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자식들에게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인 1세들은 다른 미국 부모들과는 자식에 대한 생각이 틀리다. 다른 미국 부모들이 자식의 교육에 관심을 두기는 하지만 자식들이 알아서 진로를 선택하고 공부를 해야할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인 동포 1세들은 자신의 자부심의 최종 목표를 자식들의 일류 대학 입학에 두고 있다(차종환, 1991).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여러 민족들 가운데 한인들이 가장 높은 교육열과 과외 열기를 보여주고 있어 방과후 학습이나 과외는 대도시 뿐만 아니라 소도시 지역에 있는 한인 사회에서 널리 행하여지고 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정 교사를 두어 추가학습을 시키는 경우가 한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가장 많으며 또한 사설학원들이 코리아 타운에 존재하여 학생들이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들 사설 학원은 한인학생들이 명문고교나 대학에 진학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이를 알고 백인 학생이 등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육 열기로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어림잡아 450여 개의 한인 학교에 25,000여명의 학생들이 토요학교나 주중 학교에 다니고 있다(이상오, 1991:197).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좋은 학군으로 이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인 부모들이 많으며, 이들은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좋은 학교들이 모여있는 학군(주로 교외으 백인거주지역)으로 옮긴다. 교외 거주율은 19890년 통계에 따르면 한인은 46.4%인데 반하여 백인은 33.8%, 흑인은 18.7%로 이러한 차이는 한인들의 교육열을 반영하는 것이다(민병갑, 1991e:219). 또한 한인 부모들은 미국 부모들에 비하여 높은 성적을 받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시카고의 한 조사에 따르면 백인 어머니는 학생이 A학점을 받아오기를 희망하는 비율이 11%인데 반하여 한인 어머니는 58%였고, C학점은 100%의 한인 어머니가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백인 어머니들은 67%만이 안된다고 생각한다(Yi, Y. 1987:134).
이러한 교육열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미국 명문고등학교나 명문대학에 동포 2세들이 대거 진학하고 있다. 아이비 리그(Ivy League)나 기타 명문 대학에 해마다 수백명의 한인 학생들이 진학하고 있다. 미국에는 고등학교까지는 학군에 의해 입학하지만 일부 특수 고등학교는 시험으로 학생들을 뽑고 있는데, 시험으로 뽑는 이러한 특수고교에 한인 학생들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뉴욕시에서 가장 좋은 학교인 스타이븐센트 고등학교에 한인 학생이 10분의 1정도 된다. 이러한 수치는 한인이 뉴욕시 인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한인 학생들이 전체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민병갑, 1991e).
물론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이 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한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의 학교에서 한인 학생들의 성적은 미국 전체 평균보다 아주 낮은 편이다. 이러한 이유는 이들이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어 영어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부모들이 미국사회에 적응하느라 가정내 교육환경이 아직 좋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학생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 이민을 오는 경우에는 미국 학교 생활에의 적응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학생으로 이민 오는 경우에는 한국식 사고방식을 거의 버리지 못하며 국민학생으로 이민을 오는 경우에는 몇 년 내에 미국생활에 적응하여 빠른 속도로 미국화되고 한국어나 한국 문화를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성적이 나쁜 많은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을 기준으로 부모들이 계속 좋은 성적을 강요하기 때문에 학업에 싫증을 내고 학교가기를 싫어하기도 한다. 또한 한인 부모들은 다른 부모들과 달리 영어도 못하고 미국 부모들과 같이 친구처럼 대해주지도 않고 권위적으로 누르려고만 하기 때문에 부모들에게 반항하는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더욱이 학교에서도 영어를 못해 놀림을 당하고 소외를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있다. 선생님들도 한국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해 학생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평가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학생들이 한인 학생들을 "monky", "banana", "slant", "bookworm" 등으로 놀리는 경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는 피가 빨갛지 않다고 놀려 팔목을 베어 피를 보인 사례도 있다(이광규, 1994:273). 백인만 우월하다는 식으로 묘사된 교육 내용이나 또는 학생들의 편견으로 인하여 일부 한인 학생들은 자신이 한인인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며, 한국 문화를 멀리하고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어머니가 국민학생들을 데리러 가면 동양인인 것이 싫어 빨리 학교에서 사라지며 어머니가 한국말을 쓰면 영어를 쓰라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일부 학생들은 가출하여 갱단에 가입하기도 한다. 특히 부모들이 알코올 중독자이든지, 부부 싸움을 자주 하든지, 이혼하여 자식들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할 때 많은 학생들이 가출을 하게 된다(윤병열, 1991). 한인 학생들이 미국문화에 적응하거나 또는 부모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하여 청소년 문제를 상담해 주는 기관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미국 교육은 주입식보다도 문제해결을 위한 토론, 자신의 의사표현, 음악회, 무도회 등의 생활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고 개인주의적 생활 태도를 강조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미국교육을 거친 사람들은 미국식 문화에 쉽게 익숙해진다. 또한 교육 내용에 있어서도 미국 역사와 미국의 자부심에 대한 것을 집중적으로 지도하고 백인들이 세계를 주도해 왔음을 지나치게 가�하고, 제3세계는 문화적으로 열등하고 사회의 발전이 느려 뒤떨어진 사회루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교육과정을 거쳐 유색 인종이나 한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나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자신이 한인이거나 유색 인종임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불만을 느낄 수 있다. 자신도 백인의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고 자신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백인 학생들보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계 이민의 교육열은 경이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백인과 흑인들에게 공통적으로 통하는 것은 아시아 사람들, 특히 한국 학생들은 공부벌레이고 공부만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잘 할 줄 모른다는 믿음이다. 한인이나 아시아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하기 때문에 경계의 대상으로도 여겨지며 유수한 대학들이 아시아계의 입학생을 줄이기 위해 성적 외의 다른 평가를 입학사정에 활용한다든지 내부적으로 인원을 할당한다든지 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국 유명대학에 10~30%의 학생들이 동양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급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수석으로 졸업하여 연설을 하는 경우나 또는 대입 예비고사에서 발군의 성적을 얻어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대학의 진학률도 동양 학생은 81%인데 반하여 백인들은 46%에 불과하다(Yi, Y. 1987:142).
고등학교 때까지 미국 학생들과 잘 어울리고 한인이나 한국문화를 멀리하는 일부 학생들도 결국 백인학생들이 완전히 받아들여 주지 않기 때문에 대학에 가면 한인 학생회에 참가하고 한국 문화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 학생들과 주로 생활하여 미국 문화와 영어에 익숙하긴 하지만 한국문화와 한글에 서툴더라도 한인임을 받아들인다. 대학교에 진학하여 이들은 같은 재미 동포들끼리 어울리고 한국문화와 한인사회에 대한 관심을 크게 증가시키는 경우가 많다. 결국 대학을 거쳐 이들은 자신이 한인계 미국인으로 살 수 밖에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일부 학생들은 한인 부모의 강압적 교육열을 견디지 못하지만, 대부분은 부모의 열성으로 미국학생들보다 긴 시간을 공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한국 학생들은 부모들의 말에 순종하는 편이며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미국 학생들보다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대부분의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에 익숙한 많은 동포 2세들은 유명대학, 대학원의 졸업장과 변호사나 의사 등의 전문자격증을 바탕으로 전문직이나 관리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따.
결국, 한인 이민의 교육이 상대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이유는 학교에서의 성공이 사회에서의 성공을 의미한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성취돼야 한다는 자아에 대한 시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학업 성취도가 높게 나타나게 된다(Kim, E. 1993). 그러나 한인들의 교육은 주로 학교의 성적에 집중되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봉사활동이나 기타 과외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앞으로의 교육은 전인적인 사회교육과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과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한인들이 교육계에도 많이 진출하여 있는데, 이들 한인 교수들이나 교사들이 한인 학생들의 적응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한인 사회에 대한 많은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미국에는 약 2,000여명의 한인 교수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이 1986년 창립한 '북미 한인 대학교수 협의회'는 재미 한인사회에 대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내용을 묶어 책으로 발간하였다(곽태환, 1991). 이들은 지속적으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있으며 사회과학 계통에 있는 여러 학자들이 한인사회를 분석하여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2세교육에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각종 상담 서비스나 정보안내를 수행하고 있고, 또한 주류사회와의 교량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한국일보, 1990:163~164).
4. 1.5세 및 2세
세대의 변화
한인 사회의 가장 커다란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세대간의 격차이다. 한국에서 출생하고 성숙한 1세나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교육을 받고 영어에 익숙한 1.5, 2, 3, 4세 사이에는 커다란 사회적 거리가 존재한다. 아직 3, 4세는 소수이기 때문에, 특히 커다란 문제는 1세와 1.5세나, 2세 사이에 언어적 장벽 뿐만 아니라 문화적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1세들은 영어에 아주 서툰 경우가 많아 2세들과 서로 다른 사회적 공간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화적 장벽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 한인 1세들은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나, 2세들은 자신을 미국인 또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인식하여 한국이나 한국문화에 대해 1세만큼의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1세 한인들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한인 1세들의 경우 한국식의 생활을 미국에서도 계속하기를 원하여 사회생활, 가족관계, 여가 등에서 한국의 생활을 반복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등의 한인 동네에서는 한글로 된 간판을 내걸고 한국 사람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곳을 주로 이용한다. 물론 흑인, 라티노, 그리고 백인을 상대로 가게를 하는 경우가 아주 많지만 이들 또한 가게를 벗어나면 주로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집에서는 텔레비전이나 신문, 비디오도 한글로 된 것만을 주로 즐기고 있다. 미국 정치보다는 한국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미국의 사회 문제보다 한국의 사회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안영배, 1995:355), 2세들은 왜 미국에 와서까지 1세들이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인 1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한글, 한국사, 한국 문화를 열심히 배우기를 바라며 한국인이나 미국내의 한인들과 결혼하여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또한 1세들은 1.5세나 2세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들의 말을 따라주기를 원한다. 1세인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노희준 사무총장에 따르면 "미국으로 이민온 1세대 대부분은 고국에 대한 향수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곳에서 돈을 벌어 성공했어도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으로 고국과의 끈을 이어 두거나, 무언가 기여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몸은 미국에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한국인이다(안영배, 1995:356).
그러나 1.5세나 2세들은 1세들이 미국에 와서 정착하였으면 미국생활에 적응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합리적이지 못한 무조건의 부모 공경은 원치 않으며 부모와 견해가 다르면 한국 사회에서와는 달리 이들은 직접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반박하는 경우도 많다. 어른들은 이를 무례하다고 생각하나 미국 문화에 익숙한 한인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부모들의 태도는 아주 고리타분한 것일 뿐이다. 민병갑(1991e)의 뉴욕시 한인 학생 조사에 따르면 45%의 동포 청소년이 부모들이 자신의 자유를 너무 속박하고 있다는 말에 동의하고 있었으며, 32%는 부모가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1.5세보다 2세에서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 할머니들이 특히 손자들을 봐주기 위하여 미국으로 이민오거나 1~2년 와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할머니들은 영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점차 자신의 손자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영어에 익숙한 2세들은 할머니가 영어를 못하고 미국생활을 잘 못하기 때문에 열등한 사람이거나 열등한 민족의 하나로 간주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할머니 뿐만 아니라 부모가 영어를 못하는 경우 또는 영어를 하더라도 백인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 왜 부모가 자신을 한인으로 낳았는가에 대해 또는 왜 자신이 한인인가에 대해 심각한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특히, 한인들이 미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교과서, 텔레비전,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뛰어나고 정의롭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한인들은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며 돈만 아는 사람이거나 미국문화에 대해 무식한 사람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백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아시아계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한인 학생들이 백인 학생이나 흑인 학생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인종적 분리가 강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소수에 불과한 한인 학생들이나 아시아 학생들은 다수에 속하는 백인 학생이나 흑인 학생, 때로는 라티노 학생들에게 집단적으로 놀림을 당하거나 이들의 갱단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흑인 학생들과 라티노 학생들은 아시아계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고 기존질서에 성공적으로 편입되고 있어 질투심 때문에 더욱 괴롭히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민병갑(1991e)의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친구로부터 차별 받은 적이 있는가에 대하여 30%의 응답자가 동의하였다. 미국 친구에게 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가에 남학생의 12%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미국 선생님으로부터 차별을 당한다고 느끼는 학생도 20%에 이르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태어나 이민 온 학생들에게 그러한 경험이 더 많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 1.5세들의 경우 익숙하지 못한 영어나 미국 문화의 장벽으로 놀림을 당하며 같은 반의 백인 아이들에 끼지 못하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면 부모들이 왜 이민을 왔는지, 부모들이 왜 이렇게 영어와 미국문화에 무관심하고 무식한지, 자신이 왜 한국인으로 태어났는지에 대해 원망을 하고, 놀리는 백인아이들을 혐오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혐오와 원망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부 학생들은 공부에 전념하고, 일부는 좌절하고, 일부는 백인 학생들과 계속 싸우고 일부는 아예 학업을 포기하게 된다. 학생들 스스로가 한인이 뭔가 열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면 스스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기 때문에 갱단에 참여하거나 마약을 하는 등의 일탈 행위에 보다 쉽게 참여하게 된다. 1.5세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스스로 논의하고 극복하기 위해 한인 1.5세들이 모여 한인 연합회를 결성하여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세미나, 공청회, 상담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미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차별과 싸우고 있다.
부모들은 한인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대화의 단절을 피하기 위하여 2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으나, 다른 부모들은 빨리 미국에 적응시키기 위하여 영어를 주로 사용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버지니아주 샬롯츠빌이라는 조그만 도시에도 그 지역 한인회가 중심이 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얻어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교재와 자금의 부족, 일부 학생들의 관심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교회활동에 있어서도 1세와 2세들은 분리되어 있다. 2세들을 위하여 교회가 영어 설교를 따로 하거나 동시통역을 하는 경우도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영어설교가 없는 경우 2세들은 한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단체활동이나 문화활동에 있어서도 1세와 2세가 유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2세들은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단체들을 결성하여 자신들의 힘을 조직화하고, 미국사회에의 적응이나 인종차별에 대해 조직적으로 극복을 해 나가고자 한다. 각 대학에는 한인 학생들로 구성된 학생단체들의 조직이 있으며, 자신들의 친목 뿐만 아니라 동양인 교수 채용, 학교내 인종차별에 대한 시위, 미국의 한인에 대한 사회문제에의 참여, 한국문화의 고양 등을 도모하고 있다. 물론 이들 한인 2세 학생들과 주로 대학원에 재학하는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는 사용하는 언어(2세는 영어, 한국 유학생은 한국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교류가 많지 않다. 한인계 학생들이 조직한 단체들로 한미 연합회, 한인 대학생 튜토리얼 프로젝트, 전미 청소년 지도자협회 등이 미 전역에 연계망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특히, 1992년 LA사태 이후 백인들이 한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생각이 한인들에게 널리 확산되면서 한인들도 뭉쳐서 힘을 키워야 한다는 의견이 2세들에게도 널리 확산되어 한인 사회의 힘을 키우는 데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992년 사건은 이들이 피부색 때문에 미국 사회의 주류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학교에서부터 이곳의 교육을 받고 영어에 익숙하고 미국식 생활에 익숙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LA사태와 같이 백인들이 한인을 거절한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영어를 잘 하고 미국식 사고방식을 가졌더라도 한인 또는 아시아인으로 보자 미국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2세들도 한인 사회를 보다 적극적으로 조직화하고 정치 세력화 해야 한다는 점을 많이 느끼고 있다.
한인 2세들은 영어와 미국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한인 사회에 여러 가지 기여를 하고 있다. 가족의 경우 2세들이 각종 문서나 은행 명세서, 세금 고지서 등을 부모들에게 설명해 주며, 한인이 아닌 다른 이웃과의 대화를 해결해 준다. 단체의 경우에도 영어와 관련된 문제나 또는 미국단체나 사회조직을 만나야 하는 경우 2세들이 도와주는 경우가 많다. 즉 1세들에게는 2세들이 미국사회와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일탈 행위
부모들이나 1.5세나 2세들 모두 미국사회에 적응하고 인종차별을 극복하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가족들에게 충분히 시간을 내지 못하거나 사회적 불만을 가족에게 투사하기 때문에 1.5세나 2세들 가운데 상당수의 학생들이 일탈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마약을 하건, 갱단에 가입하거나, 가출하여 빈 아파트에서 혼숙하는 현상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또는 부모를 괴롭히고 학교에서는 다른 학생을 괴롭히는 경우도 나타난다.
가장 심한 경우가 갱단인데,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 타운이 청소년 갱단의 세력다툼 무대가 되고 있다. 이 지역 및 인근지역에서 총격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또 유흥업소에 갱단이 대거 진출하고 있다. 한인들이 히스패닉계나 중국계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고, 이들이 한인계와 다투기도 한다(중앙일보, 95. 9. 4). 뉴욕에서도 한인 상점에 들어가 협박하여 금품을 갈취하거나 강탈해 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또는 식당에서 계모임을 하고 있는 주부들의 돈을 강탈해가는 경우도 있다.
일부 한인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구체적인 이유는 부모들이 대부분 가게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 오기 때문이다. 부모는 무조건 공부를 잘 하라고 하나 성적이 잘 올라가지도 않고, 성적이 떨어지면 부모들은 다른 한인 학생들을 예로 들어 '너는 무엇하고 있느냐'고 면박을 주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부모 만나기를 싫어하며 가출을 하고 동료들과 어울려 지내게 된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료 학생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다가 점차 행동 범위를 늘려, 가게 등의 강도질을 일삼게 된다. 한인청소년(13~19세)에 대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 이상이 부모가 10시 이후에 귀가한다고 응답하였고, 83%가 총이나 흉기를 소지한 경험이 있으며 남자 15~16세의 53%, 여자 13~14%가 마약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였다(한국일보 1990:97). 이러한 수치는 상당수의 한인 청소년들이 일탈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 준다. 물론 일탈한 학생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사회적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보다 조직적으로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5. 한국과의 관계
한국의 정부, 여러조직, 그리고 개인들과 재미 한인 사이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지고 있다. 미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항공편은 미국에 이민가기 시작한 60년대 말에 비하여 수십배로 증가하였고 미국과 한국의 방문도 또한 급증하였다. 상호방문만 증가한 것이 아니고 상호관계도 더욱 다양화하고 빈번해졌다. 부정적인 측면은 한국이 미국의 영향을 보다 쉽게 받게 되고 또한 미국문화를 익힌 재미교포들이 빈번하게 한국을 방문하고 더욱이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을 하게 되어 이질적인 문화요소들이 한국의 동질성을 와해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준 점이다. 그러나 재미한인들이 한국에 귀국하여 활동함으로써 한국의 여러 부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국력과 이미지는 미국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재미 한인들의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이 1960년대에서 70년대초까지 가발을 미국에 많이 수출하였는데 이를 미국시장에서 직접 판 사람들은 재미 한인들이었다. 한국에서 인권을 탄압하고, 여객선이 가라앉아 수백명이 죽고, 다리와 건물이 무너질 때 미국인들이 한인들을 보는 시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경제와 기술발전이 잘 이루어지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재미 한인들의 행동이나 성취도도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인들은 한인들을 미국인으로 생각하기보다는 한국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 재미 한인 하나하나가 한국을 대표하는 셈이다. 로스앤젤레스의 한 보험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박덕양씨에 따르면 "한국에서 삼풍백화점 사건이 터졌을 때, 이곳 동포들은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특히 건축업을 하는 제 친구들이 덩달아 입은 타격도 컸어요. 이곳에 사는 다양한 인종들은 우리들을 아메리칸이 아닌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잘 되면 우리도 잘 되고, 우리가 잘 되면 한국도 잘 되게 돼 있습니다"(안영배, 1995:363)라고 말한다.
보다 직접적인 재미 한인과 한국정부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관계가 1980년대 후반 급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의 정책도 과거에는 한인들의 정치활동을 통제하고 기술발전을 위하여 일부 과학자들을 초빙하고 2세들에게 한국에 대한 자긍심을 길러주는 것에 초점을 두었지만 점차 재외 한인들과 실질적이고 다양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육부에 속한 국제교육진흥원의 경우 매년 수백명의 동포학생들을 선발하여 1주일 단기 모국 방문에서부터 1개월 단기교육, 3개월 중기교육, 8개월 장기교육을 시키고 있다. 이곳은 또한 미국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을 초빙하여 한국어 특강과 한국 문화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한글교육에 필요한 교재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과학기술처는 해외교포 과학자대회를 후원하여 수백명의 동포 과학자들이 모여 회의를 함으로써 한인들이 가진 과학적 수준을 점검하고 이를 통해 한국 과학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하고 있다. 외무부는 해외공관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한국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고 후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교포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연구기관의 연구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매월 <해외동포>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기타 교포 정책자료를 발간하고 있다(이광규, 1994). 정부는 세계화 정책의 일환으로 현지에서 자라 현지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현지문화와 사고방식에 익숙한 동포들을 공무원으로 채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정부에서는 또한 미국의 동포 2세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중고등학교에서 미국식 영어를 가르치도록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세계한민족체전위원회(1995년 이후 국민생활체육협의회로 이관)가 주최하는 세계한민족체전이 1989년부터 개최되고 있으며 체육행사 이외에도 문화행사, 학술행사, 일반행사를 동시에 개최하고 있다. 1993년부터는 세계한민족축전으로 명칭을 바꾸어 개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에게 한민족이라는 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서다(이광규, 1994). 세계한인상공인협의회는 세계한인상공인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한민족음악회도 조직되어 세계의 한인 음악인들이 모여 공연을 하고 있다.
정부는 한인들 뿐만 아니라 미국정부내 정치인과 관료들을 통하여 재미 한인들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폭동이 일어나 많은 한인 가게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 한국 정부는 미국정치인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였고, 1995년 9월 한국의 경찰청장이 로스앤젤레스의 경찰국장 등을 초청하여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민 안전 증진 방안을 논의하였다. 정부, 기업체, 대학에서도 미국에서 일어나는 한·흑 갈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흑인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하여 한국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고 흑인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한국을 방문하고 대통령과 면담하도록 한 적이 있다.
미국에 있는 한인들이나 동포신문, 방송들은 한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자유롭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독재 정권 기간 동안 한국정부의 인권탄압을 감시하고 비판하여 왔다. 과거에 한국에서 독재정권이 심각하게 인권을 유린하고 있던 시절 미국 한인사회는 한국정부의 잘못을 적절하게 밝혀내고 비판하여 왔다. 이들의 이러한 비판은 한국 사회가 민주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특히 한국내에서는 여러가지 억압으로 이러한 비판이 불가능하였고 또한 보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많은 재미 동포들이 정부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 또한 개인적인 연계를 통하여 국내에도 널리 전파함으로써 한국정부가 더욱 심하게 인권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파제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재미 한인들은 정부 뿐만 아니라 국내의 다양한 단체와 여러가지 관계를 맺고 있다. 경영, 기술, 학계, 증권, 외환, 과학, 예술, 스포츠 등 많은 분야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이 미국의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들 중 일부는 한국에 귀국하여 또는 자문을 통하여 한국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핵융합 기술 등 여러 특수분야에서 활동한 학자들이 한국의 기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도 미국에서 활동하거나 배운 젊은 동포들을 채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들은 증권이나 환전과 관련하여 선진기술과 국제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증권사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몇몇 국회의원의 경우도 미국에서 귀국하여 정치에 투신한 사람들이다. 연예 등의 분야에서도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이들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다. 이민 2세들은 한국보다 자유분방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현대 연예 산업이 필요로 하는 소위 '끼'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활동이 더욱 기대된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친척을 가지고 있다. 이들 친척을 통하여 미국에 쉽게 이민을 가기도 하고 또는 유학을 가고 방문을 하여 견문을 넓히기도 한다. 또한 미국에 있는 한인들도 한국을 자주 방문하고 있는 이유는 이들 친인척이 한국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적 교류를 통하여 한국인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있다.
유학생들이나 회사 주재원, 방문 교수 등 1년이상 체류하는 사람들이 많은 외국물품을 들여올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접촉한 다양한 문화요소를 수입해 들여오고 있다. 교포나 재미 유학생들이 한국에 친척방문을 오든지, 또는 교육을 받으면서 한국과 다른 여러 이질적인 습관이나 행동을 보여 한국 사람들이 눈을 찌푸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한국인이나 한국학생들은 재미 동포학생들이 한국에 와서 교육을 받으면서 한국말도 잘 모르고 한국 예절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한국인과 다르고 따라서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 사이의 어중간한 존재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많은 동포학생들은 모국이라하여 한국문화, 역사, 한글을 배우려고 한국에 왔지만 한국인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와 냉대에 실망하여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물론 한국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한민족이라는 감정을 더욱 절실하게 간직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
한국의 신문이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재미 한인을 다루는 횟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중앙일보의 경우 '지구촌 한국인'이라는 면을 만들어 세계 각지역에서 한민족과 관련하여 벌어지는 일들을 보도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한인에 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어 미국속의 한인 생활이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서울방송(sbs)은 'LA아리랑' 같은 재미 한인에 대한 드라마를 직접 제작방송하기도 하고 또는 '마가렛 조는 못말려'와 같이 재미 한인을 미국의 시각에서 다룬 프로그램을 수입해다 방영하기도 하여 재미 한인들의 생활이 한국인들에게 더욱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나 재미 한인들에 대한 묘사가 한인들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아 재미 한인들이 항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여러 드라마에서 한인들이 미국에 이민가서 고생을 한다느니, 무슨 건축협회 임원인줄 알았더니 목수를 하고 있었다는 등의 내용이 나오기도 하고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느니 하는 등의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한국일보, 1990:107). 특히 재미 한인들을 화나게 한 것은 한 드라마에서 미국에 가서 기껏 한다는 것이 흑인들의 속옷이나 빨아주고 있다는 대사를 사용한 것이었다. 많은 한인들이 그러한 방송을 내보낸 한국의 한 방송사에 항의를 한 적이 있다.
모든 면에 있어서 한국과 재미 한인들의 접촉은 크게 증가하고 있으며 해외에 거주하는 많은 한인들은 한국이 또는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세계로 진출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들 해외 한인들은 한국이라는 모국이 있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세계 곳곳으로 활동 영역을 확대할 수 있고 또한 발언권을 확대해 갈 수 있다. 특히 세계 최첨단 기술이나 정보, 지식영역을 많이 가지고 있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미 동포들은 이러한 기술, 정보, 지식을 한국에 전달하고 한국이 이를 흡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이러한 도움은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6. 자랑스런 한인 후예들
초기 이민자의 후예들
미국땅에는 자랑스런 한인들이 많다. 이민자로서 워싱턴 정가에 우뚝 선 연방 하원의원이 나왔는가 하면 하와이 노동이민 2세, 3세로서 주류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전문직 인사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초기이민자의 후예들 중에서 한국의 이름을 빛낸 이들이 많은데 대부분 사진결혼 신부로 미국에 온 이를 어머니로 두고 있다.
초기 개척자들은 인종차별과 문화풍습의 차이 속에 살아 나갔지만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 미국에서 태어난 너희들만은 잘 되어야 한다.'는 굳은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육은 곧 생명이다'라고 믿고 실천을 했다.
현재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의 후예로 가장 성공한 인물은 하와이주 대법원장인 문대양씨(미국이름 로날드 문, 55세)를 손꼽을 수가 있다. 초기 이민 3세인 그는 아이오아 주립대학 법대를 졸업한 후 1966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을 했고, 순회 항소법원 판사를 거쳐서 1990년 주 대법원 판사가 되었다. 문대양 판사는 1933년 3월 임기 10년의 주 대법원장에 선임이 되었다. 그는 항시 아버지 문덕만씨의 '평소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해 왔다고 말을 했다.
미국에서 한인계 여성으로 가장 높은 공직에 올랐던 인물로는 웬디 리 그램 여사(50세)를 손꼽는다. 그는 1988년 2월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장관급인 연방선물교역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이 되어 백악관에서 근무를 했다. 그는 재임중에 연방교통성 장관의 물망에 오른 적도 있다. 4년의 임기를 마친 뒤, 1996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를 선언한 남편 필 그램 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을 돕고 있다. 필 그램 의원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출신의 한인 3세가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1945년 하와이에서 출생한 웬디 리 그램 여사는 웨슬리 대학을 마친 뒤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텍사스 A & M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미 은퇴를 했지만 초기 이민 2세로 가장 명성을 얻은 인물로는 이비인후과 의사인 세미 리박사를 들 수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과 1952년 올림픽에 다이빙 선수로 출전, 두번이나 금메달을 받은 자랑스런 한인 후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높은 공직에 올랐던 이로는 전 가주 상원 법사위원장이었던 알프레드 송 씨를 들 수가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USC) 법대를 졸업한 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을 했고 몬터레이시 지역구에서 주 상·하원에 5차례나 당선이 되었다. 한 때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장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었다.
또 하버드 대학 음대교수였던 초기이민 2세 김을 씨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이작 펄만을 위해서 곡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초기 이민 2세인 김영옥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전투에서 영웅칭호를 받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일본인촌을 지은 건축가 데이비드 현씨는 {하와이 유람기}를 쓴 독립지사 현순 씨의 아들이고, 여성으로는 김정숙 씨가 몬터레이시에서 교육 위원장을 역임했다.
하와이에는 초기이민 3세 재키 양 씨가 주하원의원으로, 도나 김 씨가 호놀룰루 시의원으로 한인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그리고 데니 홍씨가 주검찰총장, 이대일 씨가 시교통부국장, 김기남 씨가 주 재무국장, 듀이 김 씨가 커뮤니티 칼리지 총장, 하버트 최 씨가 연방 순회판사, 조지 배씨가 주 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는 이민 2세 중에 리처드 한 씨가 심장과 의사로, 프랭크 최 씨가 의과대학 교수로, 헨리 문 씨가 미국 병리학계의 권위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
신세대의 미국 주류사회의 진출
많은 1세들도 미국사회의 전문직에 진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1세의 진출은 소수의 사업, 극소수의 정치인, 극소수의 고급관리, 회계사, 의사, 교수, 과학자 등 한정된 영역에 제한되어 있는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지위에는 많이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인 2세들의 다양한 영역에의 진출은 다른 민족에 비해 아주 빠른 속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들이 사회의 중견인으로 성장하는 10~20년 뒤에는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학생들은 대체로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필자가 할렘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 동안 흑인들은 한국 학생들이 주로 A학점을 맞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고 흑인학생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고등학교 뿐만 아니라 대학에 가서도 우수한 성적을 획득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 공부의 천재로 소문이 나 있다. 이들은 학부 성적이 우수하므로 의대 대학원이나 법대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대학, 대학원으로의 진출은 부모가 전문직에 있는 경우 뿐만 아니라 중소가게를 하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유수한 대학과 대학원을 많이 졸업하고 있기 때문에 의사, 변호사, 과학자 등의 전문직으로의 진출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세들은 대부분 자영업보다 전문직업이나 사무직 직종에 진출하기를 원하고 있다.
신문방송 영역에의 진출도 늘고 있는데, 미국 3대 방송 네트워크의 하나인 CBS의 시카고 지역 방송국의 아침 7시 지역뉴스를 이끌어 가고 있는 한인 여성 리사 김(32세, 김창경)은 "한국 관련 뉴스를 보도할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곤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의 한국과 한인사회에 대한 관심도가 높기 때문에 한인 사회의 이미지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한국일보, 1995.8.7). 다른 지역 방송에서도 앵커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뉴욕 타임스>등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늘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승진이나 활동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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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민족 문제와 한인의 정체성
1. 미국의 민족 문제
2. 재미 한인의 정체성
1. 미국의 민족 문제
미국은 이민에 의하여 형성된 사회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지금까지 대략 5천만 명 이상이 세계 각처에서 북미 대륙으로 흘러 들어와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한다. 따라서 오늘날 미국에는 세계에서 발견되는 거의 모든 종족, 종교 및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데 모여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수는 아일랜드의 인구보다 많고 미국의 유태인 수는 이스라엘 인구보다 많으며, 흑인의 수는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의 인구보다 많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시(市)에는 폴란드의 어느 대도시 인구보다 많은 폴란드계 사람이 살고 있으며, 뉴욕 시에는 베니스 인구의 두 배가 넘는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2백만의 멕시코계 미국인은 멕시코 시를 제외한 여타 다른 멕시코의 도시보다 많은 인구이다. 확실히 미국 사회는 수많은 종족 집단(ethic communities, ethnic groups)으로 얽혀진 하나의 모자이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의 역사를 통하여 종족성(ethnicity) 또는 종족 정체감(ethnic identity)은 사회·문화적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고, 또 오늘날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족 집단 또는 그러한 집단 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미국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하겠다.
다양한 종족 집단간의 역동적 관계를 살펴 보는 데 있어 한때는 미국 사회의 주류를 앵글로 색슨 백인 신교도 집단(WASP)으로 상정, 새로 이주해 오는 집단들은 이러한 미국의 중심 세력을 뒤따르고 그에 동화하게 된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동화되지 않고 있는 집단의 존재와 70년대 두드러지게 나타난 종족적 정체감의 부활은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민과 관련하여 미국 사회를 보는 두 가지 대립되는 견해가 있다. 즉, 모든 인종적, 종족적(ethic)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개방적 사회가 미국 사회라는 견해와 미국 역사를 통하여 인종적 편견과 배타적 속성이 그 근본에 깔려 있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 두 번째 견해는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중심적 세력을 앵글로 색슨(Anglo-Saxon)으로 보고 여타의 인종이나 종족을 주변적·종속적 집단으로 보는 입장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첫번째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미국이 역사적으로 미국계 인디언(American Indian), 흑인, 동양인 그리고 카톨릭 교도(Catholics)와 유태인들에 대한 탄압과 차별대우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와 같은 차별 대우는 본질적으로 미국의 독립선언과 헌법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긴 안목으로 보면 미국 사회는 그와 같은 잘못을 시정해 나가는 방향으로 바뀌어져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이 두 가지 입장은 미국 사회의 역사적 현실의 일면을 각각 반영해 주고 있다. 즉, 두번째의 견해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더 1960년까지의 미국 사회는 유럽계의 이민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어쏙, 그 중에서도 앵글로 색슨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쉽게 도전을 받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특히 1920년대의 이민법에 의하여 해외 이민의 문은 좁아졌으며, 새로운 법안에 의하면 당시의 인구구성 비율에 의한 이민 쿼터가 배정됨으로 해서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과 아일랜드계의 이민을 중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미국 사회의 인종 및 종족적 구성의 비율은 과거의 유형이 유지 내지는 강화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20년과 1960년 사이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 경제 공황 등을 겪으면서 미국 사회는 크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계기로 인종주의에 대한 회의와 동부 유럽과 소련의 유태인들을 더욱 많이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사회적 압력이 증대하면서 1960년대에 들어서 이민법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서부와 북부 유럽 이민을 선호하는 이민법을 바꾸도록 하는 데는 이탈리아, 폴란드, 그리스 그리고 유태인들의 압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1960년대의 주된 변화는 1964년의 민권법안(Civil Right Act)과 1965년의 새로운 이민법 그리고 1968년의 선거권 법안(Voting Rights Act) 등을 들 수 있다.
1965년 새 이민법이 제정됨에 따라 이민의 수는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민의 원천이 또 다시 크게 달라진 점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50년대의 이민은 독일, 캐나다, 영국, 이탈리아의 순으로 그 수가 많았으나 새로운 이민법이 실시된 이후 1970년 대에는 멕시코, 필리핀, 한국, 중국의 순으로 그 순위가 바뀌었다. 이와 더불어 남미 계통의 불법 이민은 그 수를 정확히 추정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하였다. 따라서 미국 사회의 인종 및 종족적 구성의 비율은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와 발 맞추어 미국 사회 종족 집단간의 관계를 단순한 동화의 관점에서 보려는 견해보다는 차라리 문화적 다원주의의 관점에서 조망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고 보여진다(salad bowl theory).
따라서 미국 사회를 단순히 새로운 이민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앵글로 색슨의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도가니(melting-pot)로 보기 보다는 차라리 다양한 종족 집단이 이민을 해 온 역사적 과정에서 각각 어떠한 특성과 조건하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정착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미국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종족 집단의 수학적 구성비를 살펴 보면 미국 사회는 소수 종족 집단의 사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국 사회에 있어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종족 집단은 영국 계통의 종족 집단이지만 그들은 미국 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계 미국인은 13%, 흑인 집단은 11%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수의 미국인들은 인종, 종족간의 결혼으로 인하여 그들 자신을 특정 종족 집단과 동일시하고 있지 못하다. 또한 인종 구성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미계(Hispanics)는 멕시코,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쿠바(Cuba),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Venezuela), 도미니카 출신들을 모두 합하여 1980년 현재 전체 인구의 6.4%였다. 그러나 서기 2000년에는 3천~3천 5백만으로 늘어나 전체 인구의 11~12%를 차지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양한 종족 집단들은 지역적 분포, 직업 구조, 소득, 실업률, 출생률 그리고 심지어 범죄율 등에 있어서 각각 특유의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의 차이점들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차이는 각각의 종족 집단이 미국으로 이주해 올 때의 제반 사정 및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미국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인종의 구분 즉, 피부 색깔에 따른 구분이 많은 미국인들의 운명을 결정지어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부 색깔의 요인이 모든 것을 결정해 주지는 않았다. 즉 서인도제도 사람(West Indians)과 같은 흑인 집단의 소득은 대체로 백인 집단이라 말할 수 있는 푸에르토리코인(Puerto Ricans)의 그것보다 높다. 더구나 황색 인종인 일본인들의 소득은 미국 백인 평균 수입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또 이민들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왔었는가 하는 요인도 그 집단의 경제적 지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엽에 이주해 온 유태인들은 무일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종족 집단이 되었다.
종족 집단간의 경제적 차이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요인은 많다. 예를 들어, 연령을 보면 종족 집단 간의 평균 연령은 흔히 다르다. 멕시코계와 푸에르토리코계는 집단의 평균연령이 매우 낮은 반면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계 집단의 평균 연령은 상대적으로 높다. 집단의 평균 연령이 높으면 대체로 집단의 평균 소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소득이 높은 직업은 장기간의 교육과 장기간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평균 연령이 높은 집단의 소득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지역적 분포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국은 지역에 따라 경제적 여건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통적으로 농업주인 남부의 소득 수준은 북동부나 서부 공업지역의 소득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 따라서 종족 집단의 지리적 분포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집단의 평균 소득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같은 종족 집단 소속인들의 소득 차이가 전국 평균 소득과의 차이보다 큰 경우가 많다.
사회적 차별 대우(discrimination)는 아마도 인종 집단간의 경제적 차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흑인의 경우 그들은 원래 노예로 끌려와서 지난 수세기 동안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었기에 사회적 진출에 커다란 제약을 받아 왔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흑인 집단은 경제적으로도 최하위 그룹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유태인과 일본인의 경우는 그들 역시 편견과 차별을 받아 왔으나, 오늘날 경제적으로는 가장 성공적인 집단으로 부상하였다.
교육 수준을 보면, 동양인과 유태인 집단의 평균 학력이 높고 대학 졸업자의 수가 많다. 출생률 또한 소득 수준이 낮은 집단(흑인, 푸에르토리코인, 아메리카 인디언,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가장 높은 출생률을 보인다. 소득이 높은 유태인과 일본계 미국인의 출생률은 매우 낮다.
참고할 만한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소득 수준이 낮은 집단의 성원 가운데 경제적으로 성공적인 사람은 전국 평균의 같은 소득 수준대의 사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자녀를 갖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대학을 나온 멕시코계 미국인 여성(Mexican American woman)은 대학 학력을 가진 일반 여성(전국 평균)보다 훨씬 적은 수의 자녀를 갖는다. 유태인의 경우 1910년 35~44세 여자는 5.3명의 자녀를 가졌으나 1969년 35~44세 여자는 2.4명의 자녀를 가졌다.
지능(IQ)은 제1차 세계대전 무렵 군대의 지능 검사에서 유태인의 점수가 무척 낮았다. 그리고 그 무렵 이주해 온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폴란드인, 포르투갈인 그리고 슬로바키아인들의 점수는 오늘날 흑인과 히스패닉인들의 그것과 동일하였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되고 문화 동화가 이루어지면서 지능 점수는 크게 높아졌다. 이탈리아인과 폴란드인의 지능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국 평균을 상회하게 되었는 바, 폴란드인의 지능은 20세기 초 85였던 것이 1970년대에는 109로 높아졌다. 이 24점의 증가는 현재의 흑·백인간의 지능 차이(15점)보다 크다. 따라서 이상의 모든 사실들은 우리가 다양한 종족 집단의 미국 사회에 대한 적응 과정을 살펴 보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단순한 접근을 해서는 안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미국 사회에 있어서 종족 집단들에 대한 사회적 태도가 꾸준히 변화해 왔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유태인들은 한때 일류대학의 교수가 되기 어려웠으나 오늘날에는 미국 학계에 인구 비율을 훨씬 초과하는 구성비를 보이고 있으며, 프로 스포츠는 흑인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고 있고, 동양인 배척법(Oriental Exclusion Act)과 같은 것은 이제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종족 집단 간의 결혼도 크게 증가하여 아일랜드계, 독일계, 폴란드계 사람들의 경우 50% 이상이 다른 종족 집단과의 결혼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인은 다른 민족과의 결혼이 50%에 약간 못 미친다. 캘리포니아 지역의 일본인들에 대한 한 조사에 의하면 1970년대 초반 이미 50%가 다른 종족과의 결혼이었다(이 가운데 70%는 백인과의 결혼 그 다음이 중국인과의 결혼이라고 한다).
이민에 대한 태도도 변화해 왔다.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같은 이는 '몰려오는 잡다한 이민이 사회를 망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때는 미국의 인구가 200만이었고 그 가운데 80%가 영국에서 온 사람이었다). 1850년대에는 이민에 반대하는 정당인 Know-Nothing이 크게 성행하기도 했으며, 1920년대에는 이민을 크게 억제하는 법안이 통과되고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방향은 중간 중간에 역풍이 불기는 하지만, 대체로 문화적 다원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Cos- mopolitianism)으로의 변화가 지배적인 흐름이었다. 적어도 최근의 반(反)이면 무드가 고개를 들기까지는 크게 보아 그러한 변화의 방향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다양한 종족 집단의 이민 과정을 몇 가지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지역적 분포, 연령 구성, 가족 소득 등에 있어서 상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종족 집단과 이민의 시기
미국의 종족 및 인종 집단의 사회적 위치는 대략 각 집단이 미국에 이주해 온 시기와 관련이 있다. 이민의 순서는 일반적으로 말해 영국 청교도가 제일 먼저 이주해 왔고 19세기 초(1815~1860년)에는 200만 아일랜드계 이민과 150만 독일계 이민이 있었던 시기였으며, 1860~1890년의 시기에는 약 1,000만 명의 북부 유럽인이 이주해 왔다. 1890~1914년에는 약 1.600만명(80%는 동부와 남부 유럽인들)에 달하는 시실리안, 불가리아인, 러시아의 유태인이 이민으로 왔는데, 1907년의 미국 인구는 8천 7백만 명이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멕시코인의 이주가 두드러졌고 1970년대 이후에는 태평양 연안 국가(특히 동양의 필리핀, 대만, 한국, 인도, 멕시코 등)로부터의 이민이 압도적으로 불어났다. 이민의 시기와 사회적 위치의 관계는 물론 이민의 시기가 빠른 집단일수록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종족 집단과 지역적 분포
미국에 있어서 종족 집단의 지역적 분포를 살펴 보면 스칸디나비아 계통은 중서부지방(Midwest)에 많이 분포되어 왔고, 동양계는 주로 서부(예, 일본인의 60%는 캘리포니아에 거주/1970, 1980 인구조사)에 몰려 있으며 쿠바인들은 플로리다에, 그리고 멕시코계는 미국의 서남부지역(Southwest)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스코틀랜드계는 애팔래치아지역(Appalachian region, 펜실베이니아부터 캐롤라이나까지)에, 그리고 무일푼으로 도착한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와 유태인은 그들이 처음 도착한 동북부 지역의 항구 도시에 주로 정착하였다. 흑인들은 남부 지방에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뉴욕시 근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살고 있다.
지역간의 경제적 여건이 상이하기 때문에 한 집단이 어디에 많이 정착했는냐에 따라 적응의 양상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상이한 종족 집단들의 이민의 시기와 지리적 분포가 달라진 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번선(wind-driven ships)이 다니던 시절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은 주로 북부와 서부 유럽으로부터였다. 그러던 것이 증기 기관에 의해 움직이는 배가 등장하면서 남부와 동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범선이 다니던 시절, 여객선에 의한 이민은 경비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였고, 따라서 대부분은 화물선을 이용하였는데, 미국에서 부피가 큰 원자재를 싣고 가서 유럽에서 부피가 작은 공산품, 가공품을 싣고 오는 배의 남은 공간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즉, 이는 대규모 이민이 가능한 지역은 미국과 교역을 활발히 하는 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당시는 북부와 서부 유럽 지역이 이에 해당되었다.
여행기간은 1~3개월, 교역선이 다니는 항로는 무역의 유형에 따라 결정되었다. 즉 이민들 자신이 행선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가는 곳이 곧 행선지가 되었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계는 미국 동부 지방에서 목재를 싣고 오는 배를 주로 많이 이용하였고, 독일인 중 많은 사람은 뉴 올리언스에서 목화를 실어 나르는 배를 이용하였기에 미국에 도착하여서는 미시시피 강을 타고 다니는 화물선을 따라 미시시피 계곡 상류(Upper Mississipi Valley)의 신시내티, 세인트 루이스, 밀워키와 같은 북부의 화물 연락 지점에 퍼져 정착하였다. 미국의 맥주 산업은 세인트 루이스와 밀워키에 정착한 독일인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증기 기관 선박이 등장하자 여행 기간은 약 10일로 단축되고 노동자 계급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운임도 싸졌다. 따라서 이민의 유형도 미국과의 무역과 관련이 없게 되면서 이민이 크게 증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남북 전쟁 직전의 5백만이, 그 후 30년 동안에 1,000만으로 증가하였고, 그 후 15년 동안은 1,500만으로 다시 증가하였다.
이민이 오는 지역도 크게 바뀌었는데, 예컨대 1882년에는 87%의 이민이 북부와 서부 유럽에서 왔으나 1907년에는 81%의 이민이 남부와 동부 유럽에서 왔다. 흑인들의 경우에는 잘 알다시피 노예로 데려 왔고, 주로 목화 재배를 위해 미시시피, 조지아, 알라바마, 북부 루이지아나 등 남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게 되었다.
종족 계승(Ethnic Succession)
다양한 종족 집단이 서로 다른 시기에 그리고 다른 분포를 보이면서 이민해 올 때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는, 처음에는 대체로 한 집단이 이웃을 형성하여 살다가 점차로 세대가 지나면서 보다 넓은 분포를 보이면서 이주해 나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19세기 아일랜드계가 뉴욕이나 보스톤에 대량으로 이주해 올 때 앵글로 색슨족들이 피해 가고, 그 다음 중산층으로 성장한 아일랜드계는 나중에 유태인과 이탈리아인이 이주해 옴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노동 조합을 보면, 아일랜드계는 처음에 파업 진압에 동원되었으나, 후에 아일랜드계가 노동 조합을 형성했을 때는 이탈리아인들과 흑인들이 파업 진압(strike breakers)에 주로 고용되었다. 아일랜드계가 노동조합의 지도자가 되니까, 유태인과 이탈리아인들이 간부가 되고, 오늘날에는 유태인이 노동조합 지도자가 되고 흑인과 푸에르토리코인들이 간부인 노동조합도 등장하고 있다.
학교의 상황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나타나 19세기 중엽 아일랜드계 이민의 자녀는 신교도인 앵글로 색슨족이 교사였으나 반 세기 뒤 유태인 이민의 자녀는 카톨릭 교도인 아일랜드계 교사에 의하여 교육되었다. 한 세대 뒤 할렘(Halem)의 흑인 아이들은 흑인 교사보다는 유태인 교사에게 배우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국 사회의 계층 구조는 이상과 같은 이민의 역사적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미국 사회는 대체로 이민(다양한 종족 집단)에 대하여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입장을 취해 온 경향이 있고, 2) 새로운 이민은 그들이 갖는 제반 특성과 미국 사회의 여건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각각 상이한 속도로 사회적 적응과 상승 이동을 해 온 것으로 보이며, 3) 앞으로의 추이는 새로운 종류의 이민 즉, 특히 동양계와 남미계 이민을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논의의 중심을 이루게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는 다양한 종족 집단들(ethnic groups)과 민족문화들(ethnic cultures)이 미국 사회와 문화에 어떻게 통합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다만 위험을 무릅쓰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한다면, 각각의 이민 집단은 세대가 경과함에 따라 동일한 언어 문화권에서의 생활, 같은 법의 적용, 동일한 경제 체제에의 참여 등을 통하여 미국화의 과정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이며, 각 집단의 종족성과 문화적 전통의 유지는 그와 같은 미국화의 제약 속에서 당분간은 지속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한 경향을 말해 주는 상징적 자료는 다음과 같다. 즉 이민의 제3세대에 이르면 유럽계 이민의 80% 정도는 자기 종족 집단 이외의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일본계 미국인의 경우 시카고 지역의 사례 연구를 보면 제2세대에서는 15%가 그리고 제3세대에서는 50%가 다른 종족 집단과 결혼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 중서부 지역의 남미계인(南美系人)을 대상으로 한 조사 연구에 의하면 1,346명의(유권자) 조사 대상자 중 9.4%는 영어를 할 줄 몰랐으나, 놀랍게도 17.9%가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문화적 동화(Acculturation)가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종족과 문화적 배경이 다른 다양한 집단들을 한 데 묶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으느 아마도 미국의 시민문화(civic culture)일 것이다. 교육, 법, 경제, 정치 제도와 같은 기본적인 사회의 제도적 틀과 그것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미국 사회의 기본적 가치들, 예컨대 기회의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려고 하는 가치와 같은 것들이 미국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을 한 데 묶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미국인들은 개인이 원하는 한에 있어서 사(私)적인 영역에서는 종족성(ethnicity)을 유지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공(公)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시민문화의 원칙들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2. 재미 한인의 정체성
이민은 흔히 상이한 문화를 갖는 종족 또는 인종간의 접촉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종족(또는 인종)들이 접촉하게 되면 그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으로는 협동, 경쟁, 갈등, 격리, 동화, 다원주의 등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중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종족간 관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개념은 '동화', '다원주의' 그리고 '갈등'으로서 이들은 각각 다른 이론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세 가지 이론은 '동화이론'(assimilationism). '종족 다원주의'(ethnic pluralism) 그리고 '종족갈등이론'(ethnic conflict theory)으로서 오늘날 종족이나 인종관계를 다루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학설들로 알려져 있다.
동화주의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산업사회 및 대중 사회로서 그것이 갖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종족 또는 인종집단은 점차 사회적 중요성이 감소되고, 그 결과 다양한 종족 또는 인종집단은 궁극적으로 공통의 생활문화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동화이론은 미국의 경우 소위 '도가니 이론'(melting-pot theory)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로버트, 파크(Robert Park)와 루이스 위스(Louis Wirth)에 의해 대표되는 사회학의 시카고 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보다 넓게는 마르크스의 이론도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가족, 지역, 종족, 인종, 국가 등에 대한 전통적 충성심이 계급에 대한 충성심으로 대체된다고 봄으로써 종족간의 계급을 통한 동화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화이론의 성격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동화주의자들과는 달리 종족 다원주의를 주창하고 있는 학자들은,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종족집단은 중요한 단위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종족집단 또는 인종집단은 변모되어 가지만 그것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사회적 정체감의 원천으로서 그리고 타집단과의 자원경쟁을 위한 발판으로서 중요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원주의적 관점은 글레이저와 모이니한(Glazer and Moynihan, 1963, 1975)등에 의하여 제기되었고, 특히 1970년대에 들어와서 '새로운 종족성 연구학파'(New Ethnicity School)로 명칭되는 인류학자들에 의하여 자리가 잡혔다.
갈등이론은 현대사회에 있어서 자원을 둘러싼 집단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화주의자들의 경우 사회의 근대화가 가져온 기회의 증대는 집단간의 협동 내지 거대 조직 내에서의 상호적응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한 것과는 달리 갈등론자들은 산업사회의 다양화된 기회의 증대는 차라리 그것을 둘러싼 집단 간의 갈등을 심화시킬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갈등의 결과 종족 집단들은 실제 또는 가상의 경쟁집단에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집단간 계층화가 촉진되고 불평등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동화, 다원주의 그리고 갈등의 양상이 언제나 상호 배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병존하여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다원주의적 양상도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는 새로운 이민 집단이 격리되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문화적 동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를 통한 경제의 성장은 대중교육과 사무직 직업을 확산시킴으로써 집단간 동화를 촉진하는 기회를 증대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러한 사회적 상승이동 경로를 둘러싼 집단간의 경쟁을 조장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이론은 서로 대립된다기 보다는 복합 사회의 여러 종족 집단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갖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한 사회에 있어서 어떠한 경향이 지배적이냐 하는 것을 가려내는 일인 것이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보기 드물게 오랜 기간 동안 단일 민족, 단일 언어, 단일 문화를 형성·유지해 왔다. 따라서 민족 동질성의 측면에서 세계에서도 손꼽히고 민족 의식도 강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재미 동포들이 미국 사회에서 빠른 적응과 사회적 상승이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민족적 동질성과 강한 민족 의식에 힘입은 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국에서의 이민 생활은 그 사회의 중심 문화를 받아 들여야 하고 타 민족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미국의 한인 동포들 역시 다른 문화와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동화, 다원적 공존, 또한 갈등 관계를 경험했을 것이 분명하다.
재미 학자 김일수는 초기의 한국 이민들은 대체로 동화의 길을 걸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러한 점에서 재미 한인 사회의 경험은 1945년 이전 이민 세대와 1945년 이후 이민 세대로 나누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초기의 이민은 그 숫자도 적어 1903년에서 1905년 기간 동안 이주한 7,394명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일제 식민 통치 기간 동안 한인 교회를 세우고 여러 가지 독립운동 단체들을 만들어 활발한 반일제 민족 공동체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의 후손들은 미국 사회에 동화해 현재 재미 동포 사회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1924년 미국의 이민법이 동양인의 이민을 금지시킴으로써 새로운 구성원, 즉 이민 공급이 끊기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손꼽을 수 있다. 둘째 이유는 한인 사회의 인구학적 불균형으로 여자가 부족하였기에 초기 이민들의 다수가 전통적인 한국 가정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후손 중 많은 수는 타민족과 결혼함으로써 미국 사회에 빨리 동화되어 갔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민족 정체성 형성 및 유지는 우선 한국 문화 전통의 계속적 공급이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1945년 조국 해방 이후 미국으로의 이민도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1965년 이민법 개정을 계기로 이민자 수도 크게 늘어나고 이민자의 특성도 다양화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들 새로운 이민의 미국 사회로의 적응 양상 및 민족 정체성의 유지 문제도 앞선 세대의 그것과는 양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최근의 이민은 대부분이 가족 이민이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여 이주해 온 사람들이기에 1945년 이전의 이민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다행스럽게도 이들 근래 이민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어 있어 이제 그러한 연구를 중심으로 재미 동포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살펴 보기로 한다.
재미 동포들의 적응과 민족 정체성에 관한 연구는 허원무, 김광정 두 교수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에 의하면 재미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해 가는 데는 일정한 단계가 있고 이러한 적응 과정은 민족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즉 이미 앞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이민 초기(이민 후 1~2년)에 적응상 위치가 있고 그후 10~15년은 적응이 비교적 순탄한 반면, 이민 온 지 11~15년이 된 이민자 가운데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진출의 한계를 절감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사회 주변성과 주체성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적응상 어려움을 겪을 때는 민족 정체성이 큰 의미를 갖게 되고 적응이 순조로울 때는 그 의미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허원무, 김광정 두 교수는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 볼 때, 재미 한인들의 경험은 미국내 소수 민족의 적응 형태에 관한 세 가지 유형 즉, 동화, 다원적 공존, 갈등 중 어느 한 가지 유형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국 이민의 적응 실태는 아마도 상기 세 가지 유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허원무교수는 한국 이민의 적응 유형의 특성을 '추가적 적응형'(adhesive adaptation)이라고 명명하였다. 즉 한국 이민 1세들은 비록 미국 문화와 사회 과정에 어느 정도 동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아무리 오래 거주하더라도 한국 문화의 전통을 고수하고 한인 사회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허원무, 김광정 두 교수가 그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경험적 조사를 통하여 밝혀낸 것은 미국의 한인들은 한국 것을 대부분 버리지 않고 그 위에다 미국 것을 부분적으로 추가 흡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한국계 이민의 미국 문화의 흡수와 동화는 한국의 문화적 요소를 대체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토대 위에 부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재미 한인들, 특히 제1세들의 민족 정체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허원무, 김광정 교수는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들을 가지고 뒷받침하고 있다. 1979년 로스앤젤레스의 한인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미국에 영주하겠다는 사람은 33.8%, 자녀의 국제결혼을 반대하는 경우가 60.2%, 자녀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89.8% 에 달했다. 또한 생활 면에서도 한국 신문 정기 구독이 78.0%, 한국 교회 참가가 69.9%, 이웃에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이 있다는 응답이 74.8%였다. 거의 같은 내용의 조사를 약 10년 뒤 1986년 시카고에서 행하였는데 놀랍게도 응답 경향은 거의 같았다. 즉 1986년 조사에서도 미국에 영주하겠다는 사람은 32.3%에 불과했으며, 자녀의 국제결혼 반대는 45.4%, 자녀의 한국어 교육은 96.7%가 찬성했고, 행동면에서도 1979년 조사와 비슷하게 한국 신문의 정기 구독이 74.5%, 한국 교회 참가는 약 10%가 불어난 76.7%, 그리고 이웃에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이 있다고 답한 사람이 70.5%에 달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한국 이민의 제1세대는 민족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를 강한 민족 유대감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한국 이민 1세는 '미국에 있는 한국인' (Koreans in America)이지 '한국계 미국인'(Korean-American)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재미 한인들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이민 1세에 관한 분석이지만 재미 한인 사회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소위 1.5세나 2세들의 경우는 문제가 약간 다를 것이다. 이들은 우선 부모 세대와는 달리 그들이 한국계 미국인(Korean-American)이라는 정체감을 갖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한인 이민 1.5세와 2세 더 나아가 3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아직도 드물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평가 역시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예를 들면 재미 정신과 의사인 박영수 박사는 소수의 이민 2세의 면접조사 결과 그들이 한국어도 몰랐고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도 없었으며, 한국으로의 여행에도 관심이 �벗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아 개념'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또한 재미 학자 유의영 교수도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경우 한국어를 주로 쓰는 1세와 영어를 주로 쓰는 1.5세와 2세 간에는 원만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물론 그것이 일부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백인 문화권에서 자라는 한인 2세들은 영어가 서툰 그들의 부모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고, 심지어는 한국적인 것은 무조건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인 2세들의 자아 존경심(self-respect)형성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견해에 대하여 허원무 교수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소위 1.5세나 2세들은 비록 문화적으로 많이 미국화되었다 하더라도 한국 이민 사회와 아주 밀접한 유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5세대는 이중언어와 이중문화에 어느 세대보다 더 익숙해서 한국계 미국인(Korean-American)으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히 내세움으로써 다민족 사회에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그는 보고 있다. 허원부교수에 의하면, 3세의 경우도 자신의 뿌리는 한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그 증거는 그들 중 조국을 방문하는 수나 또는 방문하기를 열망하는 수가 늘고 있다는 것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허원무 교수의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세대의 차를 막론하고 강한 민족 의식과 유대를 갖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재미 한인들이 강한 민족 의식과 유대를 갖는다는 사실은 미국 사회의 성격과 한인들이 갖는 특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와 같은 경향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우리는 미국 사회가 백인 중심(특히 WASP으로 불리우는 앵글로 색슨 신교도 백인 집단) 사회로서 인종차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인은 인종적으로 백인과 확연히 구분된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은 이민으로 형성된 사회이고, 1960년대 이후 민권 운동 등에 힘입어 어느 정도 소수 민족이 살아가기에 여건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종 장벽은 완정히 허물어지지 않았기에 한국계 이민 역시 유색인종으로서 백인 중심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기에는 한계가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한국인이 문화적으로 동화되어도 인종의 장벽 때문에 사회 구조적 동화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결국 민족적 정체감의 확인은 중요한 적응 기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자라는 세대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새로운 민족 집단의식을 미국 사회 속에서 형성해 나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재미 한인 동포들(1세, 1.5세, 2세, 3세)의 다양한 적응 방식과 정체성의 형성이 여러 가지 요인들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가를 보여주는 그림을 소개하며 이 절의 논의를 마치려 한다.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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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과 과제
1. 전 망
2. 과 제
1. 전 망
미국과 한국의 전망
미국의 한인 사회는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의 틀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이들 국가의 변화, 미국사회의 인종차별과 한인들의 주류 사회로의 진출 그리고 한국사회와의 연계는 앞으로 한인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먼저 미국과 한국의 전체적인 변화가능성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명실공히 세계의 유일한 주도 국가로 발돋움하였으나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그 지도력이 많이 상실되었다. 그러나 소련연방이 와해된 다음부터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세계 정치와 경제를 다시 주도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미국은 1970년대 이후 일본과 유럽의 급속한 성장으로 절대적인 비중은 감소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 제일의 시장을 가지고 있으며 과학 기술 수준에 있어서도 미국은 세계 제일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의 절대적인 비중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세계 제일의 정치·경제력을 보유하리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저축률이 아주 낮고, 연방재정의 지속적인 적자와 지속적인 무역적자로 미국의 투자 여력은 계속 약화되고 있다.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지역인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그리고 유럽의 통합 가속화와 시장확대는 이들 경제가 점차 미국의 주도적인 위치를 위협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은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그리고 유럽이 성장하는 형태로의 과정이 지속된 것이며 반세기 이상 지나야 동아시아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정치·경제적 힘을 가지게 되어 미국의 주도권을 위협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보일 것으로 예측되며 21세기에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하나로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인당 국민소득 또한 현재는 미국의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21세기 중반까지는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정치는 30년간의 군사독재정치를 청산하여 상당한 정도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보장이 되는 체제를 이룩하고 있고, 이런 상황에는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중반까지는 남북한의 통일이 성사될 것으로 보이며 중국과의 무역은 더욱 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정치적 성장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도 여러가지 복지정책이 확대될 것이다. 이러한 성장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한국은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로서 세계 최초로 선진국에 진입하는 셈이며 따라서 제3세계의 경제나 정치발전의 중요 모델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이 한국이나 미국에도 나타날 것인데, 미국의 경우 세계 지도력의 약화와 경제성장의 축소로 국내적인 문제들이 더욱 첨예하게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사무 자동화와 공장의 해외 이전 그리고 느린 경제성장으로 앞으로 더욱 심각한 실업문제가 미국에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미국사회의 인종적인 갈등은 쉽사리 없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실업문제가 심화되면 인종적 갈등은 오히려 더욱 심각해지고 이민자들이나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더 심해질 가능성도 있다.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고 개인주의가 발달되어 있어 국가의 문화적 통합은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통일과 관련하여 동·서 뿐아니라 남·북의 지역적 갈등이 계속될 수 있다. 한국의 빠른 개방화로 청소년층이 급속히 서구화되어 기성세대와의 문화적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며, 노동력 부족으로 해외노동자가 지속적으로 유입될 것이기 때문에 한국내에서도 민족갈등이 드러나 소수민족 문제가 대두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빠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부의 분배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면 많은 국민들이 사회적 불만을 가지게 되어 사회적 불안이 지속될 수도 있다.
이주와 적응 전망
1970년대에는 1년에 3만 명씩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현재는 1만명에도 이르지 못하는 등 한국인들의 이민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특히, 이민의 가장 커다란 동기는 경제문제였는데 한국의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이민의 경제적 이점이 대체로 사라진 상태라 앞으로도 이민은 계속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에서의 생활이 인종차별이나 또는 낯선 타지에서의 생활이라 1세들 중에는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일부는 실제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이들이 역이민을 오는 이유는 한국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여 세금을 제하면 한국에서의 소득이 미국에서의 소득의 절반 정도는 되기 때문에 구태여 어려운 이민생활을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갈수록 경제적 격차가 줄어들고 미국에 가야 얻을 수 있는 것도 교통, 통신, 정보망의 발달로 대부분 한국에서 바로 얻을 수 있게 되고 필요할 때는 방문만 하면 되기 때문에, 미국에 이민을 가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단기간 체류하면서 미국의 학문, 여러 가지 기술이나 언어, 예술, 디자인 등을 배우는 것은 급속도로 팽창할 것이다. 미국과의 상업관계나 기타 업무적인 관계로 미국에서 단기 체류하는 사람들도 급증하고 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유학생들도 그 수는 늘어날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이들이 이민을 전제로 미국에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고 미국에서 전문적인 직장을 얻거나 결혼을 통해 미국에 남게 되는 경우는 계속 상당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계속 거주하는 것보다는 한국과 미국을 왕래하며 양쪽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국제적 지위의 상승과 한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가 과거보다 평등한 관계로 진전하고 있음은 미국에 거주하는 재미 동포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빠른 경제성장과 국제적 지위의 강화는 미국내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재미 한인들이 주류사회에 진출하는 데 보다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고 한·미의 정치, 경제, 문화관계에 있어서 이들 재미 한인들이 기여할 수 있는 공간의 영역은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한인들이 주로 기독교를 믿고 있고 한국에서 이미 서구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이민을 왔기 때문에, 종교생활에 있어서는 물론 구체적인 생활에서도 다른 아시아 민족들보다 쉽게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껏 한국 사람들의 미국사회적응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영어였다. 가게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순한 영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영어를 배우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이민온 지 20년이 되었어도 영어의 구사가 매우 서투른 경우가 많고 아예 영어를 거의 모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전문직에 진출한 사람들은 영어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언어 능력의 부족은 많은 한인들이 미국사회를 접촉하고 미국사회를 이해하는데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두번째 장애는 미국사회의 관습, 문화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소한 실수를 자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한인은 미국 어린이가 잘한다고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다가 또는 자기 자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매를 때리다가 어린이 학대죄로 고초를 겪은 경우도 있다. 한인 여성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가다가 동성 연애자로 오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나 언어문제들은 갈수록 세계적 접촉이 증가하고 한국내의 영어교육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한인 교회의 성격도 한인 2, 3세가 한인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는 20~30년 후에는 심각하게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들은 한글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보다 미국화되어 있어,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자주 모이고 공동체적 활동을 많이 하는 측면은 갈수록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2, 3세들에게 교회는 이민온 국가에서의 힘든 생활에 대한 피난처가 아니다. 이들은 교회를 통하여 단지 자신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싶어하므로 한인임을 느끼는 자리일 뿐이어서 감정적이고 흥분되고 은혜가 많은 지금의 한인 교회와는 다른 보다 지성적이고 차분한 분위기의 교회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김용준, 1991:232). 한인 2, 3세들은 한인교회를 특별히 다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미국 교회에 나가는 경우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에도 보이는데, 만약 이러한 경향이 계속되면 앞으로 한인 교회의 성격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수도 점차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한인들 중에도 미국에 이민온 지 오래된 사람일수록 미국화가 더 많이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세대를 내려갈수록 적응도가 높아가고 있어 한인 3, 4세의 경우 대부분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미국화된 경우가 많다. 미국의 한인사회는 갈수록 이민 2, 3세가 주축이 되고 이들의 활동이 한인사회를 주도하게 되는데, 이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의식보다 한인계 미국인으로서의 의식을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한국에 대한 절대적인 관심은 감소하고 대신 미국 내에서의 한인의 적응과 성장에 관심을 주로 쏟게 될 것이다. 언어나 문화는 배우거나 또는 세대가 내려가면서 상대적으로 쉽게 적응할 수 있어 이들 2세들은 미국 사회의 곳곳에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에 대한 교육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편으로, 한인 사회는 갈수록 인구수에 비하여 더욱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한국계기자인 강견실 씨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한국 사회와 이민 과정을 묘사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 나의 조국}(Home Was The Land of Morning Calm)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이를 통해 그녀는 미국사회가 갖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고치고 한인들의 정서와 문화, 관습을 미국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책을 썼다. 이창래는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라는 책을 써서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언론매체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즉 한인에 관한 소개가 미국에서 계속 급증할 것이며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2세들 가운데 일부는 한인 사회에 별다른 애착을 가지지 않고 또한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뚜렷하게 유지하지 않고 미국사회에 흡수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이들은 특히 다른 민족과의 결혼을 보다 쉽게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한인사회나 한인문화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가질 수있다. 이들은 또한 한국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한인 1세들과 만나더라도 같은 혈연이라거나 민족이라는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뭔가 어색하고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들이 한국계라는 생각을 절실히 가질 수도 있고, 아니면 미국인이라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어 한인계라는 것이 별다르 의미를 가지지 못할 수 있다.
또한 2, 3세로 내려가면서 한국인이라는 의식보다는 한인계 미국인이라는 또는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의식이 강화되면서 한국어의 사용이 줄어들고 또한 한글을 이용한 한인 신문이나 방송들이 축소될 것이다. 다른 이민집단들도 미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적응하면서 자신들의 말로 발간되거나 방송되는 매체는 점차 줄어 들었다. 즉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 문화와 영어에 적응하여 생활을 하게 되어 외모나 정신으로만 한인계라는 인식이 남게 된다. 이들은 아무리 미국 문화에 익숙하다고 할지라도 외모에 있어서 백인들이나 흑인과 구별이 되기 때문에, 이들이 백인이나 흑인에 의해 아시아계라고 규정됨에 따라서 아시아계라는 인식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의식을 기초로 한인의 영향력을 조직화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아시아인으로서 백인과 구별되는 상황과 백인들의 인종차별 때문에 2, 3세들은 미국 주류사회에의 진출이 확대될수록 인종 차별과 관련된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겪게 될 것이다. 한인 2세들이 명문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의사, 큰 회사의 사원으로 들어가지만 얼마가지 않아 다른 소수민족들이 공통적으로 겪듯이 백인들에 의한 견제와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조직의 핵심부서로 진출하기도 힘들고 더구나 책임자의 위치에 오르기가 매우 힘들다. 승진에 있어서도 동료백인에게 뒤지는 경우도 자주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영어나 문화에 있어서는 미국화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는 계속 소수민족의 지위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한인사회를 조직화하고 동양인들을 조직화하여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대처함으로써만이 이러한 차별의 해소가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집단의 크기가 커야 미국사회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데 동양인들이 미국사회에서 비슷한 차별을 겪고 있으면서 지역적으로 커다란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어 2, 3세들의 차별에 대한 항의는 한인 뿐만 아니라 동양인과의 연대하에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계를 묶어주는 단체나 활동에의 참여가 2, 3세에서는 적극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아시아적 연대가 강화되고 2, 3세들의 한국과의 연대가 약화된다면 한인 2, 3세에 있어서 아시아적인 소속의식, 즉 아시아인이라는 인종 의식이 더욱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한인이라는 의식의 중요성은 감소하게 될 것이다. 한인의식 또는 한국과의 연대감이 줄어든다 할지라도 한인이라는 의식은 자아 정체감에 있어서 계속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미국의 백인들이 수십년이 지나면서 백인이라는 의식이 강화되었지만 이와함께 이탈리아계나 아일랜드계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정치 활동 전망
정치적 진출의 확대 가능성이 높으며 공직에의 진출이 많아지고 있다. 각 지역에서 주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 시장, 시의원 그리고 교육위원으로 진출하는 수가 점차 늘고 있다. 대부분 한인 1세가 이룩한 것으로 지금 젊은 나이에 있는 한인 2, 3세로 내려갈수록 이들은 미국 문화에 익숙하고 변호사 등 많은 전문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정계 진출 가능성은 더욱 높다. 또한 시민권을 획득하는 사람들의 수도 많으며 2, 3세들은 태어날 때부터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인의 투표참여율은 계속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직접 선출직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후보들이나 당선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압력단체로서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다.
한인들 각자는 보수적이고 공화당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반면 많은 한인 단체들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한인들이 공화당을 지지하는가 또는 민주당을 지지하는가는 그 당시 각 당의 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물론 현재 반이민법이나 복지혜택의 축소 때문에 공화당에 회의를 품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인들은 세금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공화당의 세금축소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전체분위기가 반이민, 복지축소의 길로 가고 있으며 미국 공화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로 유력한 밥 돌 상원의원(공화당 원내총무)은 미국의 자존심을 고취하고 본래의 미국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다언어 교육을 종식하고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이민 정책이나 영어 공용어 정책은 다른 공화당 후보들도 지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인 사회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여러 한인 단체들이 반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인들이 다른 아시아계나 친이민 정책을 지지하는 단체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고, 다른 여러 문제에 있어서도 아시아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어 한인들이 단독으로 운동을 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투표에 보다 많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참여시켜야 하지만 투표인수는 빠르게 증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투표를 통한 한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계속 미미할 것이다. 따라서 다른 아시아인들과 결합된 압력단체로서의 활동, 미디어 등을 이용한 여론에 의한 활동, 개별적인 조직을 통하여 개개 정치인들에게 모금을 해주는 활동 등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역이나 동네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이 단체나 모임에 의해서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다. 동네에서의 일에 영향력을 가져야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데, 아직 한인들이 지역적인 사교모임이나 봉사모임에 잘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외지역으로 나간 한인들은 이사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백인들의 횡포를 극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법에 적극적으로 호소하여야 하고 또한 백인들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하는데, 1세들보다 2세들이 이러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법조계나 의사 등 전문직에 많이 진출하여 있어 이러한 차별을 덜 받을 것이며 또한 차별에 대처하는 데 보다 좋은 위치에 있다.
1.5세나 2세들이 조직한 단체들은 1세들이 조직한 단체들보다 한인들의 미국사회 적응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2세들이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20~30년 후에는 한인 조직들의 보다 실질적인 활동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 2세들은 영어나 미국문화에 능숙하기 때문에 한인 사회와 미국 사회와의 연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담당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한인 사회의 복지,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활동에 대한 아시아인의 연대가 늘고 있으며 2, 3세들의 활동은 아시아인들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냥 한인으로서 보다는 아시아인의 하나인 한인으로서의 조직과 활동이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재미 한인들이 앞으로 북한과 미국, 그리고 북한과 남한(한국)의 관계를 매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수천명이 넘는 재미 동포들이 가족이나 친지를 만나기 위하여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관광, 학술연구, 투자를 위하여 방문하고 있다. 일부 한인들은 북한을 자주 방문하여 북한정부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만약 한국이나 북한이 경제협력을 통한 점진적인 상호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한다면(그럴 가능성은 점점 커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재미 한인들이 이러한 경제적 관계를 매개하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비공식적인 접촉이나 사적인 접촉을 통하여 북한이 개방을 확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인 한국의 대북정책을 적대적인 흡수 통합 정책으로 의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직접적인 북한 진출보다는 재외 동포들의 북한 진출을 환영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대해 한국이 확실한 비교우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재미동포의 북한접촉도 급증,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 활동 전망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1.5세나 2세들이 자영업에 종사하기를 꺼려하고 주로 전문직이나 사무직에 진출하고 있어, 한인 1세들이 은퇴한 후에는 한인들이 운영하는 자영업의 수는 점차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작지만 가게를 시작하여 점차 부를 늘려가고 있고, 또한 이를 통해 보다 큰 중기업이나 대기업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성공하는 사람들도 많다. 생활의 안정이 이루어지면 전체적으로 노동시간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며 2, 3세의 경우 자영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적기 때문에 한인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1세 여성들이 자녀교육을 위해서 또는 돈을 어느 정도 벌어 안정이 되면 점차 경제활동에서 빠져 나가 집안일에 집중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고, 2세들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은 경우 경제활동 참여가 자영업에서 처럼 쉽지 않안 점차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전체적인 소득은 다른 민족들과 비교하여 점차 상승하리라고 본다. 특히 교육열 때문에 여러 종류의 전문직에 빠른 속도로 진출하고 있고 앞으로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불법체류 상태이며 또한 과다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 초에 뉴욕시에 사는 한인들 중 20%가 불법 체류자인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의 경제상황이 미국보다 빨리 성장하고 있고 또한 미국에서의 임금이 한국에 비하여 그다지 높지 않은 형편이라 굳이 미국에 와서 불법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은 급격히 줄 것이다. 따라서 불법 체류자들의 숫자도 빠른 속도로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한인 사회는 전체적으로 점차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뉘어 질 것으로 보인다. 자영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계속 부를 축적하거나 사업의 규모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고액의 권리금과 임대료로 자영업에 진출하기도 어려워져 임금노동자의 생활을 지속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또한 더욱 많아질 것이다. 또한 2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전문직에 진출하여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만 일부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여 불안정한 생활을 하거나 실업상태에 빠질 가능서이 높다. 일부지역에서는 벌써 한인 극빈자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한인사회의 경제적 분화는 한인사회의 통합에 커다란 지장을 줄 것으로 보인다.
2. 과 제
주류사회에의 적극적 진출
한인들은 백인들이 싫어하는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이상오, 1991: 189) 일상생활이나 사회활동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많은 동양인들이나 한인들의 성공은 일반 백인들에게 시기심을 자극하여 반동양계적 편견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일류 대학은 알게 모르게 동양계의 입학을 제한하며, 능력이 있는 회사원이나 전문가들은 동료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재미 한인들이 한인과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제부터는 미국문화와 미국사회에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 한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교회나 한인회 등 단체와 신문들이 미국 문화 또는 미국 사회에 대한 정보를 보다 적극적으로 제공해 주고 미국사회에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알성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한인들은 또한 교회나 사회생활, 여가활동에 있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백인이나 흑인들과 함께 지내려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물론 다른 인종이나 민족과 혼합하는 현상은 2~3세로 내려갈수록 강화될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타민족과의 결혼도 증가할 것임을 의미한다. 민족간 또는 인종간 결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한인 사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들에게 한국과 한인의 문화에 더욱 친숙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한인들에게도 도움이 되 ?것으로 보인다.
전문직에 종사한 한인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승진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결국 회사 등을 떠나서 상업에 종사하게 된 경우도 많이 있다. 미국 사회의 주류에 해당하는 백인들이 한인에게 노골적으로 또는 은근히 가지고 있는 인종 차별 의식은 한인들이 미국 주류사회로 진출하는 데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 물론 많은 한인들이 능력을 갖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위에 오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비록 하위직이지만 2세들이 전문직에 광범위하게 진출하고 있어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미국의 주류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봉사활동이나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미국인들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조직들이 어떻게 움직여 가는 지를 파악하여야 하며 이들의 움직임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기초로 미국인들로 조직되어 있는 지역단체나 나아가 각종 정당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이러한 단체로부터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민족은 미국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으며 지역적인 여러가지 일을 하는 데도 차별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사회는 각종 클럽이나 단체들이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활동을 하고 여론을 불러 일으키며 이를 통해 미국사회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단체에서 활동을 하여 경력을 쌓지 않고 미국 주류사회에 참여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러한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고 또한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미국 시민권의 획득은 필수적이다.
미국사회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영향력 행사를 통해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양보의 미덕보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또한 다양한 민족들이나 인종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백인, 흑인들과 자주 어울릴 수 있도록 다민족, 다인종이 참여하는 사회활동과 봉사활동에 자식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한인이라는 생각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도록 한국문화, 역사, 한글의 장점을 지속적으로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한인에 대해 또는 한인이라는 사실에 부정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미국 사회에서 더욱 적응하기 어렵다.
한·흑 갈등의 해소
한·흑 갈등도 단순히 한인과 흑인만의 갈등이 아니라 백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에 한인이 끼어있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에서 백인들이 싫어하는 흑인 빈민 지역에서 백인 기업주들을 위하여 그들의 물건을 팔아주고 있는 것이며, 또한 백인들이 소유한 건물에서 높은 임대료를 내고 있으므로 한인 상인들이 열심히 일하지만 거기에서 얻어지는 이윤의 일부를 버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한인 상인들은 백인 지배층의 대리인으로 인식되어 흑인들이 백인들에 대한 불만을 한인들에게 집중적으로 터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백인과 흑인들을 중개하면서 그 중간에서 욕을 얻어먹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백인들이 주도하고 있는 미국사회 전체의 인종적 차별이 한인을 거쳐 흑인에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한·흑 갈등은 미국사회의 전반적인 인종차별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인과 흑인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 교환 체제에서 서로 다른 편에 서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갈등은 불가피하다(김신, 1991:29). 즉 상인은 상품을 팔아서 이윤을 벌어 들여야 하고 흑인들은 물건을 구매해서 생존을 하여야 하는데, 이윤을 얼마만큼 버느냐 또는 물건값을 얼마만큼 지불하느냐의 서로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생활이 불안정한 흑인 빈민들은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소득원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때문에, 그리고 한인 상인들도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빨리 성공하고자(즉, 이윤을 많이 남기고자) 하기 때문에 더욱 첨예하게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대립적 요소 때문에 한인과 흑인의 갈등은 쉽사리 사라지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경제 구조적인 갈등요인이 사라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한인과 흑인들이 갈 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여러가지 방편들이 존재한다. 한인과 흑인들은 한인 상인과 흑인 주민들 사이에 위와 같은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갈등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여야 한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왜 한인들이 흑인 거주지역에 들어와서 사업을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것이 흑인에게 왜 이익인지도 홍보하고 동시에 흑인들의 백인 지배에 대한 구조적 불만 그리고 한인 상인들을 왜 이들 백인과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흑인들에게 백인들의 후원에 의해서 흑인 동네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한인도 소수민족으로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흑인 동네에 들어오게 된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
한·흑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흑인 사회의 이유있는 지적을 한인들이 수용하여야 한다. 상호 입장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인 상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흑인 지역의 경제발전을 위해 기부도 하고 참여도 하여야 한다. 흑인을 많이 고용하고 가능하면 이들에게 사업을 할 수 있는 여러가지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김신, 1991:38). 실제 흑인 고객을 잘못 대하는 한인 상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흑인들에 대한 자세를 고쳐야 할 것이며, 또한 흑인동네에 대한 보조를 늘려서 흑인들이 한인 상인들은 자기들을 돕는, 자기들과 같은 편에 있다는 인식을 갖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교회나 흑인 동네의 행사, 그리고 흑인가족들의 사적 영역인 장례식 등에 가능하면 참여하여 줌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민병갑, 1991b).
한인들과 흑인들이 공통의 입장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음을 또한 부각시켜야 한다. 한인과 흑인은 같은 소수민족으로 백인들이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면 한인과 흑인이 소수민족으로서 백인들의 차별에 대항하여 뭉칠 수 있는 가능서이 높아진다. 현재 공화당이 소수민족 지지정책(Affirmative Action)의 철폐와 복지혜택의 축소를 추진하고 있는 데 대하여 한인이나 흑인이 반발을 하고 있고 그 반발이 흑인사회 뿐만 아니라 한인 사회에서도 강한 것으로 보여 이러한 부분에 대한 공동보조가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반발은 흑인이나 한인 모두에게 이익이 되므로 한인들은 흑인사회와 적극적으로 공동보조를 취하고 흑인들의 입장을 지지해 줄 필요가 있다. 또한 여러가지 인종문제에 있어서 소수민족으로서 흑인들과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안중식, 1991:47).
이러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한인들과 흑인들은 미국사회에서 아주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어 앞으로도 한·흑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흑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흑인과 한인들이 미국사회에서 공통으로 처하고 있는 입장에서 같이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이 많으며 이 부분에서 한인들도 가시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흑인의 한인에 대한 불만을 최소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인들이 경제력을 향상시켜 흑인 등 특정 집단의 시장에 의존하기 보다는 점차 소비자가 여러 인종으로 다양화된 시장, 특히 백인을 포함하는 시장으로 옮겨 가도록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김신, 1991:38). 또한 과도하게 상업에 의존하기 보다는 점차 전문직 분야 그리고 제조업이나 서비스 분야 등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2세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러한 것은 앞으로 한인들이 미국사회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할 것인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한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미국 사회에 진출하여 한인들이 점하는 지위를 계속 개선시켜 나가고 조직력과 전체적인 힘을 길러 나가는 것이 흑인들과의 갈등을 축소시키고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성의 지위향상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인 사회에서 아직 여성들이 공적인 일에 참여하는 경우가 남자에 비하여 아주 적은 편이다. 미국사회에 비해서도 한인사회의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아주 제한되어 있다. 여성들의 집 바깥에서의 활동이 더욱 많아지고 있으므로 이들의 경제적 활동 외에도 한인 사회를 돕는 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도 한인단체들이 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들이 가사일이나 육아일을 혼자 전담하기보다는 남편과 협동하여 수행하여야 한다. 특히 한인여성들은 높은 교육을 받았고 2~3세들도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있으므로 이들의 많은 능력을 사장시키는 것은 한인사회 전체에도 커다란 손해이다.
여성들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고 경제적으로 가정에 기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집안에서의 일도 부부가 서로 공평하게 느끼는 방향으로 분담되어야 한다. 특히 남성들이 집안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가사일이나 아동교육에 참여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부부가 공동으로 가정과 경제활동을 꾸려가고 있다는 일체감을 느낄 수 있어야 가정문제의 많은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가사일이 사소하고 귀찮은 일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원활한 움직임에 필수적인 중요한 일임을 서로 느낄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이들이 한인 사회나 미국사회에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각성에서 나아가 한인여성들의 에너지를 통합하여 조직화시킬 수 있는 조직들이 필요하다. 특히 한인 사회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을 비추어 보아 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야 하나 오히려 교회가 여성들을 주요 직책에서 배척하고 음식에 관한 일들은 전부 여자들에게만 맡기는 등 여성들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인 교회들 가운데 성경자체의 여성들에 대한 차별적인 내용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아 현상태에서 한인 교회가 앞장서서 한인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는 많은 제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가부장제 하에서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여성들 자신이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고 사회활동을 자극할 수 있는 조직과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여성들의 힘을 향상시키고 이를 통해 불평등한 관행을 고쳐가는 데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법·제도적 개선 방안
국가간의 경쟁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고 또한 국가를 넘어서는 접촉, 조직, 연계가 급속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해외에 사는 다양한 한인들과 한민족의 총체적인 발전을 위하여 협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재외 동포들의 다양한 능력을 최대한 한민족이나, 한국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들 이민자들의 다양한 능력을 한국의 정치, 경제, 과학기술, 문화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해외에 있는 자신들의 민족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경우 유태계 미국인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가 여러 가지로 지원을 하고 있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많은 유태인 가게가 불에 탔는데 이스라엘 정부가 적극적으로 재정을 지원해주었다. 유태인들은 또한 해마다 이스라엘에 수십억 달러를 지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활동하는 많은 유태계 기업인이나 학자들이 이스라엘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물론, 유태인들은 세계사적으로는 한인과 달리 국가없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차별을 당하고 학살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한인과는 다른 특수한 상황이다. 그래서 한인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해외 유태인이 이스라엘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을 한국 정부는 고려하여야 한다.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재외동포들의 이중국적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데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이중 국적 허용이 어렵다면 재외 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또는 한국과 관련해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이것이 한국 국익에도 도움이 될 것이므로) 영주권제 등을 신설하여 미국 국적을 가지고도 한국에서 아무런 불편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외국 시민권을 가진 해외 우수인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서 국적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영주권 제도가 아니더라도 재외동포들이 국내에서 활동을 촉진하도록 국내 재산권, 출입국, 체류, 외환반출입, 국내취업 등에 대한 제한을 대폭적으로 완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이미 외국에서 많은 세계적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국가간의 경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무대에서 활동하였던 한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책들은 한국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모국은 또한 이들 재외 동포들을 한국의 발전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어야겠다.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미국이 한국보다 앞서 있는 여러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재미 동포들의 도움을 얻으면 한국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증권업 분야에서도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1.5세나 2세들이 뛰어난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 경영대학원과 증권회사에서 첨단금융기법을 배웠고, 세계적인 흐름에 민감하고 또한 프로정신이 투철한 편이기 때문에 한국 증권회사들이 첨단 증권 분야에 진출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따라서 재외 동포들의 채용이 증권 분야에서도 급격히 늘고 있다. 1994년 말에는 국내 증권 회사에 근무하는 동포들이 20명 정도였으나 1995년 8월에는 벌써 60명 정도로 늘어났다(동아일보, 1995. 8. 29. 12쪽). 이외에도 이들을 영어교사나 강사, 예술분야, 디자인, 연예산업, 통신 정보 산업 등의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면 이러한 분야의 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이들 재외 동포들의 두뇌를 사용할 수 있는 조직적인 지원 체계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지원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정부내 전담기구의 신설이 필요하다. 현재 재외동포에 대한 정책이 여러 부처로 나누어져 있어 이들 귀중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고 또한 동포들은 동포들 대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재외동포 전담기구는 또한 재외 동포를 활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재외 동포들이 세계적인 연계망을 갖추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한인들을 연계시켜 한민족의 경쟁력을 높여 한민족의 발전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표 III-6> 재미 동포의 지역별 직업
구 분 |
농림업 |
상 업 |
제조업 |
서 비
스 업 |
전문직종사자 |
사무직종사자 |
기술자 |
기능공 |
문예인 |
종교인 |
학 생 |
주 부 |
기 타 |
계 |
메 인
뉴햄프셔
버 몬 드
메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커네티컷
뉴 욕
뉴 저 지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미 시 건
위스컨신
미네소타
아이오아
미 주 리
노스다코다
사우스다코다 |
-
3
-
-
2
-
68
78
-
150
87
376
198
98
103
49
42
15
19 |
64
39
2
538
26
334
24,073
5,281
8,717
1,076
566
18,027
2,412
312
375
143
152
38
42 |
7
18
-
51
15
28
799
232
191
170
97
1,706
270
69
96
49
55
7
14 |
51
94
-
372
63
514
5,931
2,938
2,078
586
150
12,732
1,460
243
413
149
162
27
35 |
59
38
-
1,725
62
653
9,532
5,866
4,537
662
268
5,673
1,520
201
365
110
133
30
30 |
65
67
-
1,180
121
579
4,007
4,283
3,833
554
318
5,076
981
193
327
128
141
28
22 |
33
23
12
442
71
298
3,374
1,405
1,391
521
241
3,702
1,020
195
312
99
160
31
28 |
58
48
-
553
29
657
5,804
4,503
5,637
430
190
3,779
729
130
267
97
122
32
41 |
-
2
-
13
6
33
164
188
43
13
15
97
40
10
13
12
4
-
1 |
6
4
19
11
17
478
1,748
235
45
42
272
84
39
57
31
32
4
8 |
47
2
28
1,963
15
1,720
14,960
9,821
4,763
31
1,621
19,475
4,277
1,314
1,852
688
1,011
98
121 |
104
190
16
1,523
269
733
9,202
10,790
2,344
1,794
990
16,533
2,936
1,240
1,245
487
757
99
159 |
204
405
16
4,123
438
254
11,178
6,837
1,392
614
391
2,703
935
504
209
381
418
27
92 |
698
1,093
78
9,502
1,126
5,820
89,559
54,020
35,161
9,198
4,976
90,151
16,912
4,553
5,729
2,423
3,189
436
612 |
구 분 |
농림업 |
상 업 |
제조업 |
서 비
스 업 |
전문직종사자 |
사무직종사자 |
기술자 |
기능공 |
문예인 |
종교인 |
학 생 |
주 부 |
기 타 |
계 |
네브라스카
캔 사 스
델라웨어
메릴랜드
디스트릭트
오브 콜럼비아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 지 아
플로리다
켄 터 키
테 네 시
앨러배마
미시시피
아 칸 소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텍 사 스 |
48
71
2
-
35
1
1
2
7
22
-
3
1
8
6
7
9
8 |
121
152
34
3,462
2,891
53
412
463
1,388
852
196
325
153
1,271
535
479
1,228
6,724 |
23
69
-
53
40
7
-
1
57
136
25
26
-
147
12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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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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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214
80
291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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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68
138
35
138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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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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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2250
1,826
125
123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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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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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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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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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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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9 |
41
105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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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7
25
178
154
375
319
136
144
84
357
58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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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
50
127
87
5,718
3,829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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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
1,336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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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153
115
71
285
157
2,205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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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76
48
13
-
-
1
-
24
-
-
6
10
16
15
52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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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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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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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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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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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012
382
2,202
1,411
348
687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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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293
1,533
12,285 |
741
747
48
2,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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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514
179
1,687
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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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530
178
489
689
8,215 |
220
470
43
3,893
1,654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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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1,479
645
263
338
139
47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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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1,411 |
1,681
3,142
812
32,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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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5
1,708
10,543
6,140
3,722
2,693
1,253
4,410
1,598
2,287
4,830
40,765 |
구 분 |
농림업 |
상 업 |
제조업 |
서 비
스 업 |
전문직종사자 |
사무직종사자 |
기술자 |
기능공 |
문예인 |
종교인 |
학 생 |
주 부 |
기 타 |
계 |
몬 태 나
아이다호
와이오밍
콜로라도
뉴멕시코
아리조나
유 타
네 바 다
워 싱 턴
오 레 곤
북 가 주
남 가 주
샌프란시스코
알래스카
하 와 이
워싱턴디씨 |
2
22
29
46
25
7
74
11
60
53
844
188
67
-
62
- |
29
90
15
507
160
352
245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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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4
2,716
4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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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316
153 |
-
2
3
33
-
-
24
-
90
12
318
9,066
414
-
33
7 |
53
82
30
2,354
103
1,103
919
3,317
2,455
1,303
4,126
54,566
11,292
2,003
1,686
122 |
21
37
14
209
82
482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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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
469
4,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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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2
91 |
10
17
9
405
99
496
221
232
1,997
81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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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117
146 |
8
26
4
518
-
-
262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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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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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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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4
326
-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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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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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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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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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
-
-
-
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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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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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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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2,158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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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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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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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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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59
303,160
43,251
6,749
6,866
1,150 |
총 수 |
3,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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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0 |
12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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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52 |
103,502 |
958,714 |
(%) |
0.3 |
15.1 |
1.6 |
12.6 |
5 |
5.2 |
4.4 |
5.6 |
0.2 |
0.9 |
24 |
14.3 |
10.8 |
100 |
자료: 김형찬, [재미동포의 현실과 정책과제], {해외동포의 현실과 정책과제}, 국제문화연구소, 1989, pp. 70~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