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 애 망치는 `게임중독`] 마약보다 강한 유혹
청소년 33% ‘PC외톨이’… 학부모들 최대
언제부터일까. 골목길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놀이터에서 모래쌓기를 하는 꼬마도, 그네를 타는 소녀의 모습도 찾기 힘들다. 학원 문을 나서 간신히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어둠침침한 PC방에서 혹은 문을 꼭 닫은 자기 방에서 게임에 빠져든다.
13살 영민이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으로 달려가 외국인 강사에게서 영어회화를, 수학은
고등학생들의 정석 시리즈까지 배운다. 부모는 공부를 잘하는 영민이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아이는 엄마 지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학원 교재가 필요하다며 거짓말로 돈을 타간 적도 여러 번. 훔친 돈으로는 게임
아이템을 샀다. 사실을 안 부모가 컴퓨터를 못하게 하자 영민이는 아예 말문을 닫았다. “너 정말 이럴래!” 참다 못한 아버지가 꾸짖으며 한대
때렸더니 영민이도 주먹을 휘둘렀다.
17살 민수는 얼마 전 가족에게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게임만 잘하면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뭐하러 대학 가고 싫은 공부를
하느냐”는 것이 이유다. 학원비, 대학 등록금 등을 합쳐서 미리 주면 그 돈으로 PC방을 차려 쉽게 살 수 있다는 그럴싸한 이유도 내세웠다.
“학교 그만두면 군대도 안 가도 되고 게임 잘하면 돈도 쉽게 버는데 뭐하러 힘들게 사나요?”
게임에 몰두한 이후 컴퓨터로만 대화하는 아이들, 언어 장애를 겪는 아이들, 쉽게 화내고 때려부수는 아이들…. 한국 가정이 게임 중독 때문에
중병을 앓고 있다. 초등학생·중학생 자녀를 둔 부모의 최대 고민이 바로 게임이다.
정신병원에는 게임 중독으로 현실 괴리 현상을 보이는 아이들이 부모 손에 이끌려 오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다. 정보문화진흥원은 청소년 10명
중 3명이 게임중독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추산했다. 온라인게임으로 범죄에 빠져든 청소년은 연간 5000여명에 이른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사물의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유아기부터 게임을 접한다. 이달 초 정보통신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이 공동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만 3~5세 아이들 중 절반(87만명)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을 시작한 평균 연령은 3.2세로 이들 중 93%가
게임·오락 등을 위해 인터넷을 이용한다고 답했다.
한양대 안동현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게임이 잘못 습관화되면 교정하기 힘들어 중독에 쉽게 빠진다”며 “현재처럼 제대로 된 게임문화의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오히려 컴퓨터를 안 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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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 잘못 길들여진 아이들은 ‘외톨이→인터넷 게임중독→학업중단’의 순서를 밟거나 반대로 ‘인터넷 게임중독→가정폭력→외톨이’의 과정을
겪는다. 단순히 게임을 오래 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얘기다.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이 아예 현실의 범죄자로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사는기쁨 신경정신과 김현수 원장은 “중독된 아이들은 게임을 취미가
아니라 삶의 전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현실과 가상공간을 구별하지 못해 쉽게 폭력성을 드러내고 범죄를 저지른다”고 말했다.
대체 누가 아이들을 게임 속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걸까? 김 원장은 “상업적인 윤리를 망각한 게임업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폭력적인 게임과 지나치게 상업적인 아이템 판매로 판단능력이 미비한 아이들을 게임 중독과 범죄 행위로 몰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가정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지적한다. 게임 중독에 빠져든 아이들 대부분이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는 것. 항상
밤늦게 돌아오는 부모, 아이가 어떤 게임을 하는지도 모르는 무관심한 부모, 성적만 좋으면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부모들도
게임 중독에 책임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박세니 심리안정교육센터 대표는 “게임 중독 아동들은 공통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죽고 싶다는 욕구를 보인다”며 “부모가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관심거리를 만들어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6-02-11